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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상배의 북인도~네팔 탐사①
인도, 그 많은 이야기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0/01/05 10:04 수정 2010.01.05 10:09




인도는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다. 그런가 하면 수천년 동안 외세의 침략과 종교적 박해, 정치적 격변 등 큰 변화를 겪은 곳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너무나 많은 대립적 요소들이 공존하는 나라다.

연말을 맞아 그동안 네팔을 직접 찾아 히말라야로 들어가던 것을 인도 북부 종교성지를 탐험하면서 네팔로 들어가는 육로를 찾아보고자 무작정 짐을 꾸려 인도로 향했다.

부산에서 방콕을 거쳐 델리 간디국제공항에 밤늦은 시각에 도착했다. 인도의 수도이자 북인도지역 여행의 출발점이 되는 델리는 BC3000년 경에 존재했다는 전설 속의 고도(古都).

우리는 배낭여행자들의 베이스캠프라 부르는 빠하르간지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타고 40여분을 달려 뉴델리역앞 메인바자르에 도착했다. 예약없이 왔기 때문에 숙소를 이리저리 알아봐야 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호텔까지 돌아다니면서 알아보니 괜찮은 객실은 더블룸이 1천500루피(4만원 정도) 이상을 요구한다. 오기 전에 입수한 여행정보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흥정 끝에 1천루피를 주기로 하고 RS호텔이라는 곳에  머물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바가지를 썼다는 생각이 들어 옆에 있는 마이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마이호텔 옥상에는 ‘인도방랑기’라는 간판의 한국식당이 있었다.


뉴델리의 상징 꾸뜹미나르


뉴델리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주변의 유적지를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해 시티투어코스로 꾸뜹미나르(QutapMinar)와 바하이사원(BahaiTemple) 그리고 후마윤무덤(Humay’sTomb)을 선택하고 풀데이택시를 1천루피를 주고 대절했다.

복잡한 델리시내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인도에서 가장 거대한 탑으로 뉴델리를 상징하는 꾸뜹미나르였다. 술탄국의 첫 군주이자 노예왕조의 시조인 꾸뜹웃딘에이백이 세운 72.5m의 거대한 탑이다. 힌두교에 대한 이슬람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탑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바하이사원이다. 바하이교는 이슬람교의 한 분파로 인류는 형제라며 국가 간의 통합과 종교의 통일을 주장하는 신흥종교다. 숫자 9를 신성시하는 종교적 특성에 맞추어 구면체로 27개의 꽃잎을 형상화하여 신비감을 더해준다. 우리나라에도 2만여명의 신도가 있다고 한다. 사원 앞에는 한국어로 쓰여진 안내책자도 비치돼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후마윤의 무덤으로 서둘러 갔다. 무굴제국의 2대 황제인 후마윤의 무덤은 그의 사후 페르시아 출신 부인인 하지베굼의 지시에 따라 건설되었다고 한다. 무굴제국의 건축양식은 후마윤의 무덤으로 시작돼 타지마할에서 완성됐다고 한다. 후마윤의 무덤에 들어서면 탁 트인 정사각형 구조의 정원을 볼 수 있다.

매연과 먼지투성이인 뉴델리를 사람들이 왜 찾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곳을 하나 둘씩 둘러보면서 과연 인도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성지 와라나시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려 했지만 뉴델리에서는 좌석을 구하기가 어려워 올드델리역으로 가기로 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갠지스

와라나시(Varanasi)로 가는 밤열차를 타면서부터 우리들의 기구한 운명은 시작되었다. 분명히 좌석이 지정된 슬리퍼(SL)급을 탔는데 열차 안의 좌석번호가 다 지워져 짐작으로 자리를 잡아 앉았는데 현지인들이 사정없이 밀치고 앉는다. 우리들 정서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이런 환경에서 밤새 열차를 타고 가는 것은 한마디로 고통이었다. 

미국의 마크 트웨인은 와라나시를 전설보다 오래된 도시라면서 와라나시를 보지 않고는 인도를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인도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도시 와라나시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진다. 밤새 잠을 설치고 와라나시 정선역에 도착하는 순간 인도철학의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도시가 내게는 낯설게만 느껴진다.

얼른 택시를 잡아타고 힌두의 성지 갠지스 강가를 찾아갔다. 인도인들의 평생의 염원은 이곳에서 목욕을 해보는 것이고 죽어서 이곳에서 화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곳에서 화장하면 온갖 죄악이 갠지스 강물로 씻어진다고 믿는 종교관 때문이다. 와라나시의 화장터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여행자의 눈에는 그냥 지저분하게 보일 뿐인데 이곳 사람들은 성스러운 물이라며 목욕을 하고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뿌자(Puja)라는 힌두의식도 치르는 곳이다.

갠지스 강가를 둘러보고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뒤 최초로 설법을 했다는 불교의 4대 성지중의 하나인 샤르나트(일명 녹야원)를 찾아갔다. 샤르나트의 상징인 다멕스투파는 붓다가 다섯 도반에게 처음으로 행한 설법인 초전법륜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곳인데 높이가 33.53m나 된다고 한다. 와라나시 시티투어를 마치고 어렵게 찾은 레스토랑에서 인도의 정통음식인 난(Naan)과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쌓였던 피로를 풀어본다.


보드가야와 영축산


인도탐험 5일째, 와라나시에서 택시를 타고 6시간을 달린 끝에 255km 떨어진 보드가야에 도착했다. 지금으로부터 2천600년전 이곳에 와서 수행을 끝내고 싯다르타는 마하보디사원 뒤편에 있는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신심이 지극한 승려나 여행객들이 사원과 보리수 나무를 향해 오체투지(머리와 팔다리가 땅에닿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바람과 구름과 물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늘 살아서 움직인다. 한 곳에 집착하여 머물면 생기를 잃는다”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거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매인 데 없이 살고자 했다.

마하보디사원을 둘러보고 나오니 날이 저물어온다. 근처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라즈기르로 향했다. 산마루가 독수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영축산(일명 독수리봉)은 우리 양산의 영축산과 이름이 같다. 사실은 양산의 영축산도 정상이 독수리 모양이다. 라즈기르의 영축산을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죽림정사터도 볼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불교대학이였던 나란다대학을 갔는데 이슬람 침입의 흔적으로 폐허뿐이다. 화려한 유적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의미에 비중을 두고 둘러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 이상배


•양산대학 생활체육과 졸업
•히말라야 에베레스트(8천848m), 초오유(8천201m), 가셔브롬2봉(8천35m),
 로체(8천516m) 등정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천895m), 북미 맥킨리6,194, 남미 아콩카구아(6천959m),
 유럽 엘부르즈(5천643m) 등 5개 대륙 최고봉 등정
•(사)대한산악연맹 경남연맹 부회장
•체육훈장 기린장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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