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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지 경남외고 | |
ⓒ 양산시민신문 |
2008년 경남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기숙사 학교에서 생활하는 우리에게는 성적관리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학교에서 개인에게 할당한 교외 봉사활동시간이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봉사시간을 채우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작년부터 매달 의료 봉사를 가는 요양원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위해 봉사를 해보는 것이 처음이라 망설여졌지만, 진정한 봉사활동을 보여주시겠다는 아버지께 가지 않겠다는 말을 차마 드릴 수 없어 ‘아버지가 있으니까 괜찮겠지…’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길을 따라나섰다.
굽이굽이 꺾어진 길을 지나 도착한 목양관은 ‘강원도’ 하면 떠올려지는 산과 골짜기를 두루 겸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경치들을 감상하면서 나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목양관의 이미지는 불과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챙’하고 깨어져 버렸다. 도착함과 동시에 마주해야 했던 나를 향한 싸늘한 시선들.
아버지를 보시고는 다들 환하게 웃으시던 그분들이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조차 주지 않으셨다. 낯가림이 심해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성격의 나로서는, 나에게 무관심한 그분들에게 먼저 다가가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목양관의 원장님께서는 요양원 곳곳의 청소를 부탁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한분, 한분 살펴보시고 처방전을 작성해 드리는 서너 시간 동안 목양관의 각 건물에서 땀을 쏟아내고 나니, ‘처음의 쑥스러움을 참고 먼저 다가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말벗을 해드렸다면 그분들께도 나에게도 더 좋은 시간이 되었을 텐데…’라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순간 ‘번쩍!’ 하면서 떠오른 것은 바로 바이올린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흡한 실력으로 나마 교회에서 반주 봉사를 해왔던 터라 연주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혹시라도 그분들이 싫어하실까봐 걱정이 되었다. 성경책과 복음성가 그리고 내 보물 1호인 바이올린을 들고 들뜬 마음으로 목양관을 찾아갔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집중된 시선 속에서 땀으로 내 전신이 덮일 때까지 그분들이 원하시는 악보를 뒤척거리며 연주했다. 부모님의 의료봉사가 종료됨과 동시에 멈춰진 나의 활은 기대하지 않았던 우렁찬 박수를 받았다. 그 무엇보다 특별했던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날 바라보실 때의 눈빛이 달라지셨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 어느덧 나는 18살이 되어 다시 목양관에 방문했다. 도착과 함께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거리를 찾고 있는데, 이미 인근 고등학교의 학생 3명이 아침 일찍부터 와서 청소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상태를 살피시고 목양관에서 환자분들의 약과 물리치료를 담당하고 계시는 분께 설명을 드리는 동안 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대화도 나누고 책도 읽어 드렸다. 그러던 중 중풍으로 인해 무릎관절이 굳어 항상 동일한 자세로 앉아서만 지내신다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할머니 다리가 많이 차가우세요. 주물러 드릴까요?”, “……”
그 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 할머니는 말씀을 전혀 못 하세요. 할머니, 은지가 할머니 다리 주물러 드린대요. 방에 들어가서 누우세요”
‘다리가 불편하셔서 한 팔로 자신의 온 몸을 지탱하시고 바닥을 짚으시며 다니시는데, 말씀도 못하시니 얼마나 힘드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하지 않은 사람을 대할 때 살갑게 대하지 못하기로 유명한 나지만, 꿋꿋하게 침묵만을 고집하시는 할머니 앞에서는 발랄하고 말 많은 소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머니의 얼음장 같은 다리에 원활한 혈액순환을 도와드리려 양말을 조심스럽게 벗기려는 순간, 사람의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의 다리는 그 더운 여름날 두터운 겨울용 양말을 신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차가웠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성심을 다해 양쪽 다리를 번갈아 주물러 드리는 동안 나는 할머니의 눈가에 맺힌 구슬 같은 눈물을 보았다.
할머니와 같이 있던 짧은 시간 동안 목양관에 처음 찾아갔을 때 상상 속에서 그려졌지만, 금방 깨져버렸던 아름다운 이미지의 목양관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목양관은 몽환적인 이미지로 상상하고 있지 않다.
목양관에서의 봉사는 잊을 수 없는 추억과 벅찬 감동으로 차갑게 얼어있던 나의 심장에 심리치료사라는 뜨거운 불씨를 피워놓았기 때문이다. 목양관에 첫 발을 내딛을 때 내 삶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없었던 나는 그저 봉사시간에 굶주려 허덕이던 어리석은 고등학생에 불과했다.
하지만 목양관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나눈 대화와 상호 간의 진심이 담긴 감정교류는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용기와 타인의 입장을 누구보다도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 주었다.
현재의 나는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그 분들과 시간을 보내고 봉사를 하기엔 시간적인 한계가 있다. 그래서 봉사활동을 통한 기쁨과 그 분들을 더욱 전문적으로 돕고 싶다는 마음에 사회복지에 관한 직업을 찾아보게 되었다. 어떤 이는 나에게 ‘이제야 꿈을 찾은 거냐?’고 묻는다. 빠르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오랜 기간을 통해 깨닫게 된 나의 진정한 꿈이기에 오늘도 난 세계 최고의 심리치료사를 꿈꾸며 누구보다 열심히 그 꿈을 향해 정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