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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네 프랑크의 집 앞에서 | |
ⓒ 양산시민신문 |
2박 3일의 일정인데 영국에서 이전 일정을 마치고 암스테르담 공항에 내려서 지하철과 트램을 갈아타고 호텔에 도착을 하니 이미 밤늦은 시간이었다. 하루 반 동안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사먹고 고흐 박물관을 다녀왔고 오후는 기차를 타고 Mauritshuis로 가는데 그 곳이 헤이그에 있다는 것이다. 역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암스테르담에서 1시간가량 떨어진 헤이그로 가는 기차를 탔다.
‘헤이그’는 우리에게 의미 없는 그냥 낯선 도시 이름이 아니다. 이곳은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만국 평화 회의에 알리기 위하여 고종이 파견한 3인 중 이준 열사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분사한 곳이다. 을사조약과 구한말에 관한 이야기를 일행 중의 청소년들에게 들려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기차를 타고 가면서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해 주었다. 그 곳을 찾아보자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사전 조사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서 일단 처음의 목적인 미술관 방문이 끝나고 나면 생각해보기로 하였다.
초 절약 여행이긴 하지만 나는 자주 여행을 다니는 편인데 새로운 것을 배우고 느끼며 우리가 방문하는 곳을 축복한다고 생각하면서 여행을 다닌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져서 우리나라 기업의 광고나 제품을 보고 반가움과 자랑스러움을 느낄 기회도 많다. 그렇지만 이국땅이기에 때로는 외롭기도 하고 작은 문제가 생기면 필요이상 크게 염려하게도 된다.
이준과 그의 동료들은 모두 패기 있고 훌륭한 사람들이었겠지만, 나라를 잃고 그 부당함을 국제회의에서 알리는 것 이외에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 비밀리에 임금의 위임장을 가지고 100년도 더 전에 이 헤이그를 밟았을 때의 그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니 가슴이 찡했다. 그런데 같이 간 어른 중에서도 이준 열사가 병이 나서 죽었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할복하여 피를 뿜고 자살하였다는 사람이 있었다.
Mauritshuis 미술관 관람이 끝나고 나오니 겨울의 짧은 해는 이미 지고 있고 날씨도 너무 추워 일행들에게 이준 열사의 유적을 찾자고 주장하지도 못하고 섭섭하지만 기차를 타고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여러 가지 미술관들은 이미 문을 닫았고 가까운 곳에 안네프랑크의 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곳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안네프랭크는 네덜란드에 살던 유태인 소녀인데 나치의 유태인 박해가 심해지자 그 아버지가 사무실로 쓰던 건물의 2층에 온 가족과 친지가 2년 동안 숨어 지내다가 발각되어 수용소에서 죽었다. 아버지는 생존했는데 전쟁이 끝 난 후에 안네의 일기를 발견하여 책으로 펴내어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나도 어릴 적에 이 책을 읽었다.
일행 중에서 내일까지 사용할 교통권을 사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줄 서서 기다려 겨우 표를 사고 지도를 보고 트램을 타고하여 안네프랑크의 집에 도착하니 문 닫을 시간까지 20분 정도 남았다고 한다. 짧은 시간이라도 관람하고 가자는 일행들의 의견으로 입장권을 사려고 하였지만, 매표소 직원은 너무 짧은 시간 동안 허겁지겁 보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내일 다시 와서 볼 것을 제안하였다.
호텔로 돌아가는 트램을 갈아타기 위해 일행들과 헤어지고 그 곳에 있는 큰 슈퍼에서 바게트 빵과 샐러드, 치즈, 과일, 우유 등을 사와서 저녁으로 먹고 하루를 정리하였다.
다음 날, 필수 일정은 국립 미술관 보는 것만 남아 있지만 미술관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아침 이른 시간에 안네 프랑크의 집에 갔다. 이른 시간이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표를 사고 있었다. 좁고 낡은 집을 외관은 현대식으로 꾸몄지만 내부는 그 시절의 모습으로 재현하고, 일기의 부분을 발췌하여 벽에 적어 놓고, 가족과 친구 중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동영상과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된 안네프랭크 일기를 전시하여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일기의 내용 중에 같이 숨어 있던 남자 아이의 16세 생일에 주식투자하는 보드게임을 선물로 받았다는 내용도 있고, 어른들은 영어를 공부하기 위하여 영어 사전을 찾아 가면서 디킨슨을 읽고 아이들은 시간을 정해서 외국어를 배우고 하는 것을 보고 유태인이 세계의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이유와 유태인 교육의 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였다.
이 집을 관람하는 것은 나치가 한 엄청난 만행과 유태인의 비극을 가슴으로 느끼며 경건해지고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데, 이것을 어른은 8.5유로 청소년은 4유로라는 적지 않은 돈으로 입장료까지 받으면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잘못을 용서는 해도 잊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과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내내 마음 한 편에 조금씩 고개를 내미는 것은 이준에 대한 미안한 생각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헤이그에 이준을 위한 박물관이 하나 있다는 것과 그가 속했던 감리교 교단에서 순국 100주년 기념교회를 헤이그에 짓는다는 것 그리고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를 기념하는 움직임이 영 없지는 않은 것을 보면서 안도는 되지만 이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깨끗하게 정리되지는 않는다. 다음에 우리의 많은 이준들의 발자취를 찾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떠나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영산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