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시간
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핀다
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번 꽃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한소끔의 밥꽃을
백기처럼 들었다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냄새
방금 꽃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 마저 갈 수 있겠다
정끝별 시인
1964년 전라남도 나주 출생. 1988년 <문학사상>지에 시로, 1994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평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등이 있다.
-----------------------------------------------------------------------
![]() | ![]() | |
↑↑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양산지부 회원 | ||
ⓒ 양산시민신문 |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쓸쓸하게 번져오는 존재감 같은 것. 꽃들은 봄볕에 일제히 피는 듯싶지만 제각각 나름의 사연과 나름의 시간을 가지고 스스로를 버텨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봄날 지천의 꽃들은 단지 오늘이 아니라, 꽃을 경험하는 과거이자 미래이기도 합니다. 꽃을 피우고 홀씨를 날리고 끊임없이 생존을 위해 번식해가는 저 치열한 生에게 봄날은, 잠시 떠올려보는 ‘미련(未練)’같은 것입니다. 잊지 않았다고, 잊지 않겠다고 그렇게 또 봄이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