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통해 말하다
시간이 누적되면서 산란하는 유채꽃잎
노란 입들이 오물거리는 것을 본다
입이란
목숨을 연명하는 통로인 동시에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통로
한 목숨 연명하기에도 힘든 양민들 입을 보고
이데올로기 붉은 통로라고 우기던
치정자들 붉은 입술을 시대는
문서의 행간마다 흰 것으로 위조해 놓았다
붉고 푸른 것이 뭔지도 모르는 양민들 입만
붉다고 기재해 놓았다
살아온 삶의 흔적이 저렇게 노란 것을
총성꽃 느닷없이 피는 유채꽃 행렬 속에서 울리는
4․3사건 진혼곡,
피어린 말을 쏟아내는 제주섬 입술을 본다
유채꽃처럼 붉지도 희지도 못한 말
총성에 봉합 되어버린 그들
노랗게 흔들리는 육성을 듣는다
봉합선 터지면서 열매를 맺는 유채꽃
광기의 역사가 시간을 터뜨린다
붉지 않음을 외치려고 피는 호소문
유채꽃들을 통해 내지르는 죽은 이들의 화화花話,
그들이 붉다고 이제는 말하지 않지만
비명의 환청에 시달리는 나에겐
온통 붉은 꽃입이다
정진경 시인
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03년 시집『알타미라벽화』발간.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부경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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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경 시인이 펴낸 두 번째 시집 <잔혹한 연애사>(현대시세계, 2009)가 내게로 건너 왔다. 힘든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언제 또 이렇게 짬을 내어 시를 지었을까, 시력(詩歷)으로나 학력(學歷)으로나 내가 보고 배워야할 선배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우선 뜨거운 박수와 축하 인사부터 올린다.
삶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듯한 그녀의 시편들은 한 번 읽고 방치하기엔 그 음성이 너무도 뚜렷하고 선명하다. 그것이 개인사적이든 사회 역사적인 것이든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육화하고자 애쓰는 그녀의 가슴은 어떠하며 그의 시의 자리는 어디만큼 가 있는지 짐작하게 된다.
‘꽃을 통해 말하다’는 ‘제주 4.3사건’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채꽃’을 통해 지나간 역사를 떠올리고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등가 시키는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이 ‘한 목숨 연명하기에도 힘든 양민’, ‘붉고 푸른 것이 뭔지도 모르는 양민’들을 적으로 몰아 무참히 학살한 역사적 사실을 ‘유채꽃’을 통해 재현 하고 있다.
아마도 시인은 제주도 여행길에서, 나부끼는 ‘유채꽃잎’을 바라보며 ‘오물거리는 입’을 연상한 모양이다. 그리하여 ‘피어린 말을 쏟아내는 제주섬 입술’을 통해 ‘유채꽃처럼 붉지도 희지도 못한 말’, ‘노랗게 흔들리는 육성을’아프게 ‘듣는다’고 말한다. 피어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아아! 비명도 못하고 쓰러져간 민초들의 무기력함, 그 고통을 ‘꽃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명의 환청에 시달리’다 아프게 토해낸 ‘온통 붉은 꽃입’, 다 타버린 줄 알았던 잿더미 속에 이토록 뜨거운 꽃뿌리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니! 우리가 어떤 역사를 뒤로하고 여기까지 왔는지, 비통했던 역사를 환기시켜주는 시인의 통찰에 따스한 차 한 잔 드리고 싶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