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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월간 한국수필 신인상 당선작(2010년 6월)] 10년..
오피니언

[월간 한국수필 신인상 당선작(2010년 6월)] 10년 젊어지기

양산시민신문 기자 341호 입력 2010/07/27 11:18 수정 2010.07.27 11:18



↑↑ 流星 유영호
시인, 수필가, 사진작가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 회원
데코스톤 대표
ⓒ 양산시민신문
“어르신 여기 앉으세요.”

이 말은 내가 43살 때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대학생쯤 돼 보이는 젊은이에게 들은 말이다. 처음에는 그 말이 내게 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그 학생은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재차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쿵쾅. 난 커다란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초라한 내 모습은 점점 더 작아지며 쥐구멍을 찾고 있었다. 선의로 자리를 양보한 그 학생이 고맙기보다 불쾌하기도 하고,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앉아버리면 이제 갖 마흔을 넘긴 남자가 자리 양보를 받는 노인이 될 것이고, 앉지 않으면 그 학생의 호의를 무시하는 격이 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잠시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았지만,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얼른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난 그 학생에게 곧 내릴 거라 말하고 다음 역에서 내려버렸다. 전동차 꽁무니를 따라온 바람이 옷깃을 헤집는 플랫폼에서 블랙홀 속으로 빠지는 전동차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지금 난 터널 속을 걷고 있지만 어둠은 결국 끝이 있을 것이라고 마음을 추스르며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했다. 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온 몸을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지만, 이게 내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차라리 시원했다.

당시에 난 IMF라는 초대형 폭탄을 맞아서 하던 사업은 물론 가정의 존립까지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눈만 뜨면 여기저기 손 내미는 빚 독촉에, 돈을 구하러 다니며 빚 가림하기도 벅차서 모양새에 신경을 쓸 겨를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렇게 시달리며 일 년을 보내다보니, 머리카락이 뭉텅 뭉텅 빠지고 검던 머리는 반백이 되어 버렸다. 넓은 이마에 언제 이발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부스스한 머리가 하얗게 보이니, 그 학생의 눈에는 내가 인생의 막장에서 바둥거리는 초라한 노인으로 보였나보다.

불어 닥친 경제난은 나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니었지만, 건축에 관계된 일을 하던 나는 특히 더 타격을 받았기에, 삶이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어려웠다. 아무리 궁리를 하고, 여기저기 찾아다녀 봐도, 만나는 사람마다 손사래를 치며 싸늘한 시선만 남기고 돌아섰다. 이젠,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던 12월의 어느 밤, 겨울비가 내리는 울산 문수축구장의 주차장에서 노트북을 꺼내 유서를 쓴 적이 있었고, 그때 흘린 눈물은 살면서 흘린 눈물 중에 가장 서럽고 차가운 눈물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죽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나하나 사업의 상처를 정리하고 나니 내 머리카락은 더 하얗게 되었지만 그것이 문제는 아니었다. 모진 목숨 어떻게 하던 가족들과 살아야 했기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일을 찾았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난 예전에 하던 건축자재 영업을 시작했다. 그 후로 10년, 열심히 살다보니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기회가 다시 왔고, 난 그 기회를 붙잡아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나름대로 영역을 넓혀가던 작년 12월 25일이었다. 서양에서 태어난 예수라는 분 덕택에 하루를 온전하게 집에서 뒹굴고 있었다. 리모컨을 콕콕 누르며 바보상자와 놀기가 슬슬 지겨워 질 무렵, 홈쇼핑 채널의 머리 염색약 광고에 눈길이 멈춰졌다. 쇼핑 호스트가 생글거리며 10분이면 10년이 젊어진다는 말을 하고 있었고 내 머리는 이미 TV 화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세상은 참 좋아졌다. 다음날 물건이 도착했고, 택배 상자에 관심을 보이던 아내는 내용물이 머리 염색약이라는 것을 알고는 “갑자기 웬 염색, 염색하면 눈이 나빠진다는데 당신은 눈도 안 좋으면서 그냥 대충 살지, 이제 와서 뭐한다고 귀찮게 염색을 하려고 그래” 등등……. 잔소리를 한바탕 쏟아 놓더니 반상회에 간다고 나가 버린다. 평소에는 집 앞 상가나 마트에 같이 나가면 사람들이 내 머리를 보고 시아버지랑 다닌다고 놀린다더니 막상 염색을 한다니 잔소리를 하는 게 내심 서운했다. 나가서 손님들 만나려면 젊게 보이는 게 좋다며 잘 생각했다는 칭찬을 은근히 기대하던 나는, 아내의 퍼붙는 잔소리에 기가 죽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10분의 투자로 10년이 젊어진다’는 광고가 내게 주는 메세지는 너무 강렬했다.

아내가 염색을 해 주리라는 기대를 포기한 나는 상자를 뜯어 설명서를 읽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잠시 고생하면 10년의 젊음이 온다는데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렇지만 생전 처음해보는 머리염색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내 딴에는 조심한다고 했지만, 머리카락만 염색이 된 게 아니라 머릿속 피부와 귀, 목덜미 심지어 이마까지 온통 염색약으로 칠갑을 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거실 바닥은 물론 머리를 감은 세면대까지…….이것은 큰 재앙이었다.

조금 있으면 돌아올 아내의 앙칼진 목소리……. 어떻게 하든 빨리 이 난국을 수습해야 하는 나는 때수건으로 머릿속과 이마, 귀, 얼굴을 사정없이 밀고 또 밀었다. 그러나 검게 묻은 염색약은 왜 그렇게 안 지워지는지, 염색약의 성능은 상상을 초월했다. 피부가 벗겨져 머리 전체가 따가웠지만 여기서 포기하기엔 내 몰골은 너무 추했다. 결국 아내가 돌아와 그 광경을 보게 되었고, 그새를 못 참고 일을 저질렀다는 잔소리를 들으며, 그날 밤 늦게까지 아내의 도움을 받아 피부에 묻은 염색약을 지웠다.

젊음이라는 것, 그 것은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고통을 견디고 난 후에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낮선 남자가 자신의 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난생 처음 해본 머리염색, 사십대 초반부터 흰 머리가 나기 시작해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염색 좀 하라 해도, 겉모습보다 내면을 잘 가꾸는 게 더 좋을 거라는 아집으로, 염색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힘겹게 지낸 10년 세월을 거꾸로 돌려놓고 싶었는지, 흰 머리에 대한 반항이었는지, 아니면, 미모의 쇼핑 호스트에게 홀려서 그랬는지, 그때는 꼭 염색을 하고 싶었다.

인간은 누구나 젊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한다. 천하를 얻은 진시황도 젊고 오래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세상 그 어디에도 불로초가 없었고, 결국 모든 것을 다 놓아 둔 채로 죽었다. 또 우리의 역대 많은 왕들도 늙는 게 두려운 나머지, 젊음을 유지하는데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먹었지만 세월을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눈부신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도 많이 늘어났고, 일부 부유층들은 성형수술과 보톡스 같은 주사제를 이용해서 자신의 외모를 젊게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돈을 들여 외모를 조금 바꾼다고 진정한 젊음을 얻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많은 운동과 잘 조절된 식습관, 그리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사고가 함께해야 진정으로 젊게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외모가 조금 젊게 바뀌었다고 지난 시간까지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지난날을 추억하며 매달리는 것은 더욱 안쓰러운 일이지만, 염색을 하고 난 후, 만나는 사람마다 젊어 보여 좋다며 띠 동값하고 연애를 해도 되겠다고 놀리는 사람도 있어 기분이 좋다. 10분 투자로 10년이 젊어질 수 있다는 광고에 현혹되어 시작한 염색이지만, 젊게 보여야겠다는 마음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내 안에 있었던 것 같다. 단지 ‘10분의 투자로 10년이 젊어진다’는 광고가 잠들어 있던 내 감성을 흔들어 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젠 머리 염색을 집에서는 하지 않는다. 이발소에 갈 때마다 이발과 염색은 필수가 되었고, 아내도 더 이상 염색하는 것에 토를 달지 않는다. 보는 사람마다 젊게 보여 좋다는 검은 머리가 나도 좋다. 그러나 아직 띠 동갑 애인은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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