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최영미 시인
1992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첫 시집인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1994년 한 해 동안 50만 부 이상의 판매기록을 세우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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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양산지부 회원 | ||
ⓒ 양산시민신문 |
언젠가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 식사를 하는데 그 중 센치한 친구에게 괜히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곁에 앉았습니다.
“최영미 식으로 반응 좀 해봐”라고 농담을 했더니, 눈만 둥그레 하더군요. 시에 여성성을 담보로 한 재밌는 허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