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상북면 대석휴먼시아아파트 문화공간에서는 사할린 동포의 영구귀국 1주년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사할린 동포 이영차(67) 씨는 “고국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웃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며 중풍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몸을 싣고 함께 귀국한 아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평생 고국의 무관심 속에 러시아인으로 살아오다 인생의 황혼기가 되어서야 고국을 찾은 사할린 동포들. 그리움과 큰 기대를 안고 한국 땅을 밟은 이들, 특히 양산을 택해 둥지를 튼 이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 귀국 1주년을 맞아 사할린동포의 삶을 되돌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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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보다 생활은 많이 안정됐지만 아직 적응할 게 많습니다”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협회 김기남(68) 회장은 지난 1년간의 고국생활을 행복하면서도 힘들었던 시간으로 돌아봤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고국에 자리를 잡았지만 언어장벽과 생활고는 여전히 고국생활의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대한적십자사 경남지사 양산지구협의회에 따르면 현재 양산지역에 거주하는 사할린 동포는 78명으로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등으로 강제 징용됐던 동포 1세와 2세들로 구성돼 있다. 지난해 10월 말 80명이 정부의 영주귀국 사업에 따라 양산 상북면 대석리 국민임대아파트로 이주했으나 그 사이 1명이 지병으로 숨지고, 1명이 사할린으로 되돌아갔다.
귀국 초기에는 언어와 환경 등 모든 게 낯설었다. 러시아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도 커 돌아가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 생계급여만으로는 안정된 생활 어려워
시간이 흐르면서 양산시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생활은 차차 안정돼 갔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생각보다 컸다.
정부가 지원하는 생계급여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와 동일한 수준인 2인 가구 기준 약 86만원 정도다. 아파트 임대료, 관리비, 공과금 등을 내고 나면 한 달에 50만원으로 생활해야 한다. 하지만 난방비가 많이 드는 겨울에는 쌀 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양말 한 켤레 살 돈조차 남지 않는다.
박장녀(71) 씨는 “아파트가 시내와 떨어져 있어 시장이나 면사무소 등으로 잠시 외출이라도 하려면 어김없이 버스를 타야하는데 버스비도 상당한 부담이 될 정도”라며 “이런 경제사정 때문에 보건소 무료 진료를 제외하고는 아픈 몸을 치료하는 것은 엄두도 못낸다”고 속사정을 털어놨다.
더욱이 부부 가운데 한 명이라도 사망하게 되면 생활급여가 그 절반으로 떨어진다. 실제 지난 16일 지병을 앓고 있던 남편을 잃은 박귀복(66) 씨는 슬픈 마음도 미처 추스르지 못한 채 앞으로 다가올 생활고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 일자리ㆍ소일거리 없어 무료한 일상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일용 근로라도 나서고 싶지만 사할린 동포들은 기초생활수급자라 경제활동을 할 수가 없는 처지다. 간단한 아르바이트라도 찾아 나서지만 고령의 사할린동포를 받아줄 만한 일을 찾기란 그리 녹록치 않다.
이구자(65) 씨는 “사할린 귀국 동포 상당수가 대졸자이고, 이들 가운데는 교사 등 전문 직종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있다”며 “경제사정이 어려운 사할린에서는 여자도 모두 일을 해 왔는데 이렇게 한국에 온 뒤부터 대부분 하는 일 없이 놀고 있어 답답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사할린 동포들은 소일거리 없이 매일 무료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햇볕이 잘 드는 벤치에 앉아 동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는 것이 하루 일과 가운데 유일한 외출일 정도다.
김기남 회장은 “정부가 도움을 주는 것에는 너무 감사하다”면서도 “나이가 들어서 일을 많이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가계에 보탬이 되고 무료한 생활을 보내지 않게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게 뭔가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언어ㆍ문화 달라… 귀국 1년 여전히 ‘이방인’
언어장벽도 크다. 귀국 동포 상당수가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한국말을 해도 북한말과 비슷할뿐더러 러시아말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는 이웃들은 낯선 외국인들을 대하듯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박이자(64) 씨는 “처음에는 아파트 관리실에서 나오는 안내방송을 잘 알아듣지 못해 힘들었다”며 “다행히 얼마 전부터 양산시에서 일주일에 두 번 씩 한글교실을 열어줘 지금 배우고 있는데, 3개월 후에는 이마저도 배울 수 없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전했다.
서로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데도 어려움이 있다.
박장녀 씨는 “여기 사람들은 이웃끼리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사할린에서는 생일이면 이웃끼리 한데 모여서 조촐한 파티라도 여는데, 여기는 명절이 돼도 연말이 돼도 이웃끼리 얼굴 맞대고 축하하는 법이 없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인사조차 안하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과 이방인처럼 바라보는 이웃의 낯선 시선 등이 사할린 동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사할린동포 영주귀국 지원캠프를 운영해 왔던 적십자 윤애경 캠프장은 “50년이 넘는 동안 러시아에서 생활하다보니 언어도, 문화도 달라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며 “사할린동포 어르신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지자체와 지역 사회단체들의 진심어린 배려와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영호 의원(무소속, 상ㆍ하북) 역시 “한평생 그리다 돌아온 고국인 만큼 우리사회가 책임지고 보듬어야 마땅하다”며 “현재 정부에서 ‘사할린동포지원특별법’ 제정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관련법이 정비되면 시 차원의 지원조례를 제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