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화요살롱]감성... 시각... 색감..
오피니언

[화요살롱]감성... 시각... 색감

양산시민신문 기자 361호 입력 2010/12/28 09:30 수정 2010.12.28 09:29



 
↑↑ 신현경
영산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 양산시민신문 
한해를 마무리하며 작업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그 중 하나가 눈에 뜨인다. 3월 10일 수요일 밤 11시, 추적 60분에서 ‘10대들의 폭력’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프로그램이었다. 제목 옆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남의 아픔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자신도 스스로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는 자기중심적 시각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 그룹의 여자 아이들이 증오에 차서 자신의 동급생 한 명을 죽도록 발로 짓밟는 영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보기에 그건, 자신의 화를 남한테 풀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신한테 화가 나있는데도 남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하고 증오를 투사하는 것이다. 왜 남을 괴롭히면서 화를 푸는가? 자신의 느낌을 표현해 보지 못하고 억누르기만 해서 참기만 하면 폭발하게 되어 있다. 어쨌든 억누르거나, 아니면 자신 안으로 향하여 자신을 괴롭히거나 바깥으로 약자한테 화를 풀게 된다.

그래서 억누르는 방법만 배우게 된다. 느낌을 표현해도 함께 나누거나 반응해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폭발해서 자라지 못한 감성을 미성숙하게 표현하면 공부하라고 잔소리만 하는 어머니한테 야단만 맞는다. 그러는 부모들도 자신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서로를 느낄 수 없으니 싸워도 화해할 줄 모르고 소통을 할 수가 없다. 사실 소통이야말로 사랑을 나누는 방법이다. 그래서 자신을 느끼고 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자신의 느낌을 억누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자기표현을 억제하게 되면 자신을 느낄 수 없이 생각만 자라게 된다. 이성적인 논리와 판단 능력은 좋을 수 있으나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게 되는 자기중심적 시각만 자란다. 그래서 객관적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에서 합리화하면서 살게 된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회피나 방어는 자기 느낌을 피하거나 이성적으로 합리화하여 무의식에 억눌러버리는 일이다. 억누르기만 하는 느낌은 감성의 황폐화를 강화할 뿐이다. 이러한 감성의 미성숙은 자기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보는 시각을 말한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구축해 놓은 근대의 환상을 두고 마틴 제이는 데카르트적 원근법이라고 하였다. 사람은 저마다 보는 시각이 모두 다르다. 삼차원의 세계를 지각하여 이차원의 이미지로 인지하기 때문에 자신이 구축해 놓은 세계 안에서 수없이 다양한 해석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바깥에서 받아들이는 정보의 80~90%를 시각으로 받아들이며 이 중에서 60%는 색으로 지각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감성과 시각, 그리고 색감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색과 감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색에서 전하고 있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거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색을 단어에 대한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사고가 경직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느낌을 억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감성의 미성숙한 단계는 색감에서 미성숙함을 드러난다는 이야기이다.

색을 보는 인식은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는 관점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두고도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로 느낀다. 물론 시각의 다양한 해석만큼이나 사람들마다 좋고 싫음이 다르다. 하나의 대상을 두고 상반되는 느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식에 의한 관점의 차이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렇게 변하는 마음이 색에 대한 기억이나 능력에 따라 다르게 영향을 미치지만 색을 보는 능력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감성 능력의 차이이다. 다시 말해 감성 능력과 그 상태에 따라 색을 인식하고 느끼게 된다. 사람은 색에 대한 체험의 축적을 통해 자신의 느낌과 인식을 쌓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색을 기능적으로 잘 쓰는 사람들이 조화로운 감성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의 감각 훈련이 되어 있다면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단순한 원색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과는 감성적인 면에서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러나 색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누구나 다 자기 느낌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색을 기능적으로 잘 쓰는 사람과 감성적으로 느끼면서 쓰는 색에는 인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기능적인 필요에 의하여 색을 잘 쓰는 사람이라도 사고를 주된 기능으로 활용하면서 자신의 느낌을 분리하고 있다면, 즉 배움이 삶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감성은 있으되 억누르고 있어 예민해지는 감성 때문에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또한 글로 자신을 표현해 온 사람이라도 감성이 부족하다면 그 글은 기교에 불과하다. 기교에 가득찬 표현은 자기 내부로부터 나오는 진솔한 표현과 틀린다. 이는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성숙한 감성은 색감능력의 부족으로 드러나며, 사실 그 삶은 건강한 삶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사고가 개념화되면 창의력이 들어갈 틈이 없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들의 경우에도 표현력이나 색감, 창의력에 자신이 없어 그림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미술을 전공해도 시각력의 확장이 아니라 기교만 발달하게 되는 경우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한계에 부딪치게 되어있다. 창의력이 없는 사람은 남이 하라는 대로 따라하는 삶을 살게 되고,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피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원인은 경제, 사회, 문화적 요인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제대로 된 시각 교육의 부재에 있다.

그래서 미술은 그림을 그리면서 그 속에서 자신을 보고, 느끼는 과정상에 발달하는 시각과 감성 훈련이 목표이다. 잘 그리라고 하기보다는 그 과정을 얼마나 즐기고 자신을 표현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