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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화요살롱]화이부동(和而不同)의 공동체를 위하여
오피니언

[화요살롱]화이부동(和而不同)의 공동체를 위하여

양산시민신문 기자 364호 입력 2011/01/18 10:30 수정 2011.01.18 10:29



 
↑↑ 성호준
영산대 동양문화연구원장
영산대 학부대학 교수
ⓒ 양산시민신문 
1941년 양산 인근 지역에 살던 19살의 소년은 단돈 80엔을 가지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밀항을 하였다.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까닭에 밀항자 신분인 그는 일본 형사의 가혹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조센징’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는 도쿄의 다다미방 하나를 빌려 자취를 하고 있던 고향 친구를 찾아갔다. 여장을 푼 그는 곧바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의 정해진 시간에 우유를 어김없이 배달하자 그의 성실성에 감탄한 주민들의 배달주문이 폭주했다. 처자식을 고국에 두고 낯선 땅 일본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그는 마침내 일본과 한국에서 손꼽히는 재벌그룹의 총수가 되었다. ‘조센징’이라 멸시하고 손가락질했던 많은 일본인의 아들ㆍ딸 손주들에게 일자리라는 ‘은혜’로 보답하였다. 그는 롯데그룹의 신격호 회장이다.
   
일요일 저녁 가족들과 1박2일이라는 TV프로그램을 시청하였다. 외국근로자와 1박2일 멤버들이 짝을 이루어 MT를 가는 편을 방영하였다. 프로그램의 중간 즈음에 네팔,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파키스탄, 미얀마 출신인 근로자들이 부모와 처자식 등을 만나는 장면은 코끝이 찡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감동을 주었다.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멀리 떠나와 이국에서 갖은 고생과 서러움을 겪고 있는 외국인근로자들에게 가족은 오늘의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의 뿌리일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1964년 12월 독일 루르탄광지역을 방문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파독 광부들과의 만남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광부 300여명과 박 대통령은 가난한 나라의 설움을 하염없는 눈물로 쏟아내었다고 한다. 1977년까지 독일에 간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보내 온 돈은 1억153만달러나 되었다. 수출액의 2%나 되는 돈으로 오늘날 우리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오늘날의 우리를 돌아보자. 우리는 우리의 옛 모습을 쉽게 잊고 사는 것 같다. 우리 속담에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다. 어렵고 가난한 시절 미군 군용차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껌과 초콜릿을 구걸하던 모습, 미국에서 들어온 밀가루로 목숨을 부지하던 모습, 중동의 뜨거운 모래 바람을 맞으며 밤낮으로 건설현장에서 가족을 위해 일하던 모습이 우리의 올챙이적 모습이다. 찢어지는 가난의 대물림을 끝내고자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모습 또한 우리의 올챙이적 모습이다. 개인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과거를 잊어버리면 희망 또한 잃어버린다고 한다.

다시 우리 주변을 보자. 우리 주변에는 또 다른 우리의 과거들이 우리의 모습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우리보다 키가 작거나 크고 피부색이 우리보다 희거나 검은 우리들의 과거들이 있다. 아니 또 다른 우리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돈을 벌기 위해 이역만리 낯선 땅 독일의 가장 어두운 탄광에서 석탄을 캐던 모습, 사우디에서 두건을 두르고 살인더위를 이겨내며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고자 불철주야 일하던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 모습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외국인 이주근로자들과 이주여성들이다. 양산지역에만도 5천여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우리 공동체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공동체라는 말은 ‘한 몸’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우리 공동체의 일부라면 그들은 우리의 팔다리, 두뇌, 심장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우리의 몸’은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물질적으로 시혜를 베풀고 우리의 삶에 도움을 달라고 하는 일방적인 사랑을 강요할 수 없다.

우리 몸의 각 지체가 한 몸을 이루고 서로의 역할에 유기적으로 관계하듯 사랑은 상대를 자신과 같이 대하여야 가치가 있다. 그것이 공자가 말하는 사랑 곧 인(仁)이다. 자기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과 더불어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배려함이 인(仁)이다. 이미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들이 없는 우리 ‘한 몸’은 상상할 수 없다. 벌써 우리의 아내, 며느리, 식구, 어머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조화를 이루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조화롭다고 하는 화(和)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화’는 ‘화(禾)’와 ‘구(口)’로 이루어져 있다. 한 솥밥을 같이 먹는 한 식구 공동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화’는 조화로움이 이루어진 아름다움의 모습이다.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면서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조화롭고 평화로움을 추구하고 자기와 같아지기를 강요하지는 않는 것이 군자이며 이와 반대로 자기 것을 강요하며 같아지기를 요구하나 그들과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 소인이다. 이 화이부동의 공자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하게 와 닿는다.

우리의 문화를 그들에게 강요하고 같아지고 배우라고 강요하고 적응하라고만 다그치지는 않았는지, ‘조센징’이라 천시하며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만든 일본인들과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산성과 효율이라는 자본의 잣대로만 그들을 보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몸의 각 지체가 기능과 모습은 다르지만 ‘한 몸’이듯 차이를 이해하고 더불어 가는 우리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들을 문화적ㆍ경제적 소외계층으로만 생각하여 물질적ㆍ기술적 지원만으로 우리의 역할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은 이제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우리이다. 우리의 형제이자, 어머니이며 며느리이다. 먼저 마음을 보듬으며 더불어 가자고 진정으로 손을 내밀어야 할 때이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우리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공동체는 건강해 지며 우리의 삶도 행복해 질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물질적 풍요만이 보장된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행복하고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할 줄 아는 화이부동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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