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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시민신문 |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昌原)읍이었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내가 난 곳은 양산(梁山)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 되어 곧 창원으로 이사해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순수어린이잡지 ‘소년’ 1980년 10월호에 이원수 선생이 기고한 글 가운데 일부다.
이원수 선생은 ‘흘러가는 세월 속에’라는 기고를 통해 출생지는 양산이었지만 ‘마음의 고향은 창원’이라고 밝히고 있다. 1911년에 양산에서 태어났지만 이듬해인 1912년에 창원으로 이사 간 것이다.
이는 지난 이십여년 간 양산시가 이원수 선생의 출생지로, ‘고향의 봄’의 문학적 배경지로서 북정동 생가터에 기념사업을 벌이고자 했던 근거에 정면으로 배치하는 내용이다.
또한 선생은 이 글에서 ‘고향의 봄’을 쓰게 된 배경이 창원이라고 밝히고 있다.
선생은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원수 선생은 1911년 11월 17일 양산 북정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양산시는 춘추공원에 이원수 노래비를 세우고, 북정동 일대에 고향의 봄길을 조성하는 등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이렇다 할 기념사업을 펼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계 한 인사는 “한때 부산의 한 문인으로부터 이원수 선생이 양산에서 태어나 초등하교까지 다녔다는 말을 듣게 된 이후부터 그를 기리는 사업이 일부 추진된 것으로 안다. 하지만 본인이 양산이 고향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 만큼 우리는 이 곳에서 태어난 문인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여기에 2000년대에 접어들어 선생의 친일 논란까지 더해져 양산시로서는 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선생은 일제 말기에 ‘지원병을 보내며’이라는 제목의 시를 비롯해 일본을 찬양하는 시와 산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친일 문인 논란 끝에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와 상관없이 창원시에서는 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꾸준히 이어졌다. 고향의 봄 도서관과 이원수문학관이 건립되었고 문학기행, 기념공연 등이 열리고 있다.
이원수 선생 탄생 100주년과 타계 30주년을 맞이한 올해 역시 다양한 기념사업이 펼쳐진다. 타계일인 1월 24일부터 11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학술세미나와 창작동요제, 국제아동문학축전, 기념공연 등이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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