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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도시 라즈꼿의 삼거리 코너 전경. 대형간판이 건물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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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외대 인도어과 한국외대 지역대학원 정치학 석사 인도 첸나이무역관 관장 한국인도학회 부회장(현) 영산대 인도연구소장(현) 영산대 인도비즈니스학과장(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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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도심을 다니다 보면 여기저기에 커다란 광고판이 널려있다. 기업들의 광고나 영화배우의 얼굴이 많이 보인다. 색깔도 울긋불긋 하고 현란하여 어지럽기도 하다.
특히 사거리 코너에 대형 광고판이 설치된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대형 광고판은 매우 커서 4,5층 정도의 건물은 가려져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광고판은 대부분 인도를 가로막고 서있어 보행에 상당한 불편을 준다. 심지어 광고판을 피해 차도로 걸어야 하는 곳도 많다.
이런 대형 광고판을 건물의 주인이 설치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설치하는 것이라면 믿겠는가? 생각해 보자. 내가 사거리 코너에 5층짜리 건물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내 건물을 가릴 만큼 커다란 광고판을 건물 앞에다 설치하면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가만히 있을까?
그런데 인도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다. 내 건물 앞에 광고판이 있다고 이를 치우라고 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광고판을 설치하는 사람이 바로 그 지역의 권력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층민의 무허가 집은 정치인 소유
인도에는 집도 절도 없이 거리에서 천 하나로 온몸을 감싸고 잠을 자는 사람들이 많다. 밤늦게나 새벽 일찍 거리를 나서면 천으로 얼굴까지 덮고 누워 자는 사람들을 여기저기 많이 보게 된다. 이들보다 좀 나은 사람들은 대부분 빈민가에 위치한 방 한 칸 크기의 집에 산다. 세탁이나 릭셔운전, 가정부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남인도 타밀나두의 강가·바닷가·도로변에는 허름한 집들이 줄을 지어 빈민가 구역을 형성하고 있다. 당연히 무허가 집들이다. 거무스름한 색깔의 나무로 지어진 이러한 집들은 우리나라의 초가집처럼 보인다. 초가 형태이기는 하나 우리나라의 누런색의 볏짚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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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첸나이 외곽의 빈민가 모습. 두 평 남짓한 움막에 6~7명이 거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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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벤카테시라는 인도친구와 시 외곽으로 빠지는 대로변의 빈민가를 지나다가 건장한 청년 몇이 어느 한 집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았다. 벤카테시는 나를 보고 웃으며 집세 받으러 온 것이라고 한다. 무허가 집에 누가 집세를 받느냐니까 정치인들이라고 한다. 힘 있는 정치인들이 여기저기에 무허가 빈민촌을 만들어 놓고 집세를 받아간다고 한다. 정치인이 뒤를 봐주고 소위 마피아라고 하는 폭력조직이 직접 돈을 받아간다. 직접 자기 집을 지으면 되지 않느냐니까 힘 있는 정치인이 아니면 지을 수가 없다고 한다. 대충 보아 서너 평 크기인데 1999년 당시 매월 500~1천루피를 낸다고 했다. 우리 돈으로 평균 2만 원정도인데 여기 사는 사람들의 월급이 1천~3천루피 수준이니 적은 금액은 아니다.
생선이야 파리야!
90년대 초 델리에 주재할 때 가끔 집사람과 시장을 보러 갔다. INA 마켓이라는 우리나라의 재래시장과 같은 곳에 갔을 때 시장 한가운데에 좌판이 길게 검은색으로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이 나쁜 나는 집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저 검은색으로 길게 늘어선 좌판은 무슨 물건들이지?” 집사람은 건성으로 “생선이야” 하고는 열심히 다른 물건을 흥정하고 있었다.
‘생선이라고?’ 궁금한 나는 혼자 검은 좌판으로 가까이 갔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니 이게 온통 파리 떼가 아닌가? 좌판에 늘어놓은 생선 위에 거의 빈틈도 없이 수백 마리의 파리들이 앉아있었다. 사람이 가까이 가서 슬쩍 건드려도 날아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생선 맛에 흠뻑 빠져있는 것이다. 가게 주인은 파리를 쫓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다음부터는 생선 반찬이 올라오면 그 장면이 떠올라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인도인은 파리나 모기를 잘 잡지 않는다. 한번은 인도인 달미아 친구와 러시아 친구를 부부동반으로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식사를 하기 전에 거실에서 맥주 한 잔 하며 잡담을 하고 있는데 파리 한 마리가 계속 근처를 맴돌면서 신경을 거슬렸다. 마침 집에는 서울에서 다니러 오신 어머니가 계셨는데 어느 새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가운데 탁자로 오셔서 앉아있는 파리를 파리채로 내리쳐서 잡고는 ‘고놈의 파리 겨우 잡았다’고 하시며 기뻐하셨다.
그런데 그 순간 달미아 부부가 인상을 확 찌푸리면서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후 내색은 별로 안 했지만 식사시간 내내 그 부부는 불편해 하며 빨리 돌아가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도 사람들은 파리나 벌레들이 가까이 오거나 음식에 앉으면 손사래를 쳐 슬쩍 내쫓기만 할뿐 죽이지는 않는다. 우리처럼 손바닥을 마주쳐 모기를 잡는 것도 본적이 없다. 비록 미물일지라도 살생을 하지 않는 전통이 매우 강하다.
몇 년 후 어느 날 아직도 시장에 파리가 들끓느냐고 집사람에게 물어보니 그전 보다는 파리가 많지 않다고 한다. 직접 본적은 없지만 생선가게 주인이 좌판 위에서 파리약을 뿌린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한다. 가게 주인이 위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나 보다. 이제는 파리 대신 파리약을 생선과 함께 먹어야겠다.
도시 빈민가
인도 주재원들은 뉴델리에서는 대개 이층짜리 단독주택의 일층을 월세로 임대한다. 우리나라 아파트 크기로 보면 60내지 80평정도 된다. 주거 단지는 대개가 2,3층의 단독으로 구성되고 대지 면적 100~200평정도 크기이다. 정원도 잘 가꾸어져 있고 길가에 가로수도 많다. 마을 주변에 숲이 우거진 공원도 있어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한번은 거물급 인도 사업가 집에 초대되어 갔는데, 일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나 되고 뒷마당에는 수영장, 골프 연습장까지 있었다. 시내 한복판인데도 언뜻 봐도 몇 천 평은 돼 보였다. 경비원·정원사·가정부·운전기사 가족들이 별도로 거주하는 쿼터도 따로 있었다. 심지어 점성술사까지 있어서 우리 일행들의 생년월일과 시간을 물어본 다음 점을 쳐주었다. 한국과는 3시간 반의 시차까지 계산하여 점을 본다고 한다. 이런 저택 바로 옆에 빈민가가 늘어서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자.
뉴델리에 주재한 지 몇 달 만에 아이들하고 집 근처를 산책하다가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집 뒤의 골목을 우연히 빠져나가 보았다.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경관에 깜짝 놀랐다. 시내 한가운데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나무 한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고 어른 키 정도 높이의 토굴 같은 집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마치 거대한 공원묘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공원묘지와 다른 점은 잔디가 덮여있지 않고 집 크기가 묘지 하나하나 보다는 조금 더 크다는 정도였다. 토굴 입구는 거적 한 장으로 막아놓고 몸을 절반쯤 숙여 드나든다. 가까이 가보니 안은 어두컴컴한데 대략 두 평정도 크기에 여러 사람이 함께 기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수도나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는지 의심스러웠다. 우리가 그 동네에 들어서니 동네 아이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금새 주위로 모여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무섭다고 하여 2,3분 만에 돌아왔지만 나는 한동안 멍한 기분이었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이토록 극명하게 대비되는 데가 지구상에 또 있으랴 싶다. 그 때의 빈민가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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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 뉴델리 외곽 철도변의 빈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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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빈민가 출신 소년의 좌절과 성장을 담은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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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 운전기사의 집을 가 본 적이 있었다. 벽돌로 칸막이가 된 일층집들이 연이어 있었는데 폭 1m 정도 폭의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갔다. 크기는 대충 7,8평정도 되었다. 거실이라고 할 만한 곳이 부엌과 함께 사용되고 있었고 한쪽 벽 옆에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하여 큰 물통에 물을 받아쓰고 있었다. 실내는 신발을 신고 생활하므로 깨끗하게 유지될 수가 없었다. 이곳도 빈민가였지만 내가 본 토굴 빈민가에 비하면 양반인 턱이다. 90년 당시 외국인 집에 고용된 운전기사면 급여가 10만원 정도여서 하층민으로서는 괜찮은 수입에 속한다. 따라서 그나마 이곳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첸나이 지역은 이러한 하층민이 대부분 강이나 호수 주변 혹은 바닷가 백사장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벽은 나무판자로 대충 덧대고, 담은 벽돌과 진흙 등을 얼버무려 대충 세워놓고 지붕은 천막 같은 것으로 얼기설기 엮어놓았다. 비만 오면 침수되고 모기가 우글거려 정말 가까이 가기가 꺼려지는 곳이다. 강변이나 백사장은 그들의 화장실이니 낭만을 느끼려고 백사장에 갔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으니 발 밑을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