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주태 양산읍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시위하다가 체포되었다. 같은 해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했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후유증으로 1928년 28세에 생을 마쳤다. ⓒ 양산시민신문
전병건 1919년 3.1운동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양산지역 항일운동을 주도하며 양산청년회운동을 주도하였다. 점차 사회주의자로 전향하여 양산청년회를 양산청년동맹으로 변모시키는 주된 역할을 했다.
이귀수 3월 27일 양산읍 만세운동에 엄주태, 전병건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한 후 피신하였다가 제2차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일경에게 피검된 후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주봉 1919년 3월 당시 양산군청 사환으로 근무할 때 엄주태 등이 양산읍 만세의거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자 찬동하고 군청 등사판을 엄주태 집으로 가져가 독립선언서ㆍ공약서 등을 등사하는데 협조하였다.
강재호 양산만세운동 참여했다가 피검돼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23년 동경대지진으로 귀국해 양산청년회관 건립 등에 협력하고 동아일보 양산지국장, 개벽 잡지사 지사장, 3.1동지회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안덕원 3월 27일 양산읍 의거 후 일경에게 체포돼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후유증이 악화하여 1922년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류경문 1차 양산읍 의거에서 이귀수와 함께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청과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항의하다 헌병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징역 6개월이 선고돼 옥고를 치렀다.
오택언 서울중앙학림에 유학 중 한용운의 지령에 따라 서울 3.1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한용운의 밀령을 받고 통도사에 내려가 신평 의거를 주도했다. 하지만 의거 전 3월 7일 피검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뤘다.
양만우 1911년 6월 출가해 통도사에 입산해 승려로서 김상문, 박세문, 이기주 등과 함께 신평 만세 운동을 벌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에 통도사 초대 광복 주지로 추대돼 4년여간 통도사를 이끌었다.
양산향토사연구회 / 자료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