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토닉셔, 오토바이, 자전거, 사람이 복잡하게 엉켜있는 카르와리 시장 거리 |
ⓒ 양산시민신문 |
어제의 약속은 내일 변할 수 있다
인도는 한마디로 다양한 사회라고 표현된다. 종교ㆍ인종ㆍ언어 등이 각각 다른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여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혀 공존하고 있다. 또한 카스트라고 하는 신분제도로 인하여 계층 간의 이해가 상충되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은 이해관계가 합치되었다가도 내일은 상충되는 상황이 수시로 발생한다. 단일민족, 단일문화 속에서 자라온 우리가 우리 기준으로 인도인을 대하다가는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인도인 입장에서 이해해 보면 그들 나름대로 사회를 유지해나가는 처세술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 샤르마와 라주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이해가 일치하여 합의를 하였다고 하자. 그러나 다음 날 검토해보니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 이를 파기하고자 하는 경우, 파기하려는 측에서 타당한 사유를 들어 논리를 전개하면 상대방이 쉽게 받아들인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인도에서는 계층ㆍ종교ㆍ인종 간의 이해관계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어제의 상황에 맞게 약속한 것을 오늘의 변화된 상황에서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약속 변경에 쉽게 합의한다. 이처럼 상황 변화에 순응해 나가려는 생활 태도가 인도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 시켜온 주요한 요소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부정적인 면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아주 사소한 분야까지도 자신이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해 변명과 구실을 붙여 자기합리화에 급급해 한다. 인도인은 기업의 최고결정자부터 바닥 청소부까지,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하여 설혹 잘못된 점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잘못을 인정하기를 꺼려한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일이 잘못되었다고 온갖 사유를 들어 변명한다. 오히려 이를 이해하지 않는 우리 측이 이상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흑백 논리에 젖은 우리가 보기에는 모든 것을 상황 변화에 돌리는 인도인의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상황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중요한 때에는 인도인의 유연한 대처가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 |
↑↑ 인도 전통 복장인 사리를 입은 여인 |
ⓒ 양산시민신문 |
인도인은 싸우지 않는다
인도에 주재하면서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다고 느낀 것은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떠들거나 싸우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뉴델리에서 딱 한 번 도로 한복판에서 싸우는 것을 목격하였다. 교차로에서 승용차가 정차하면서 앞에 서 있던 오토바이를 건드려 쓰러뜨렸다. 오토바이에 탄 20대 초반의 청년이 승용차로 다가가 항의하자 승용차에서 30대 정도의 남자가 내리더니 무조건 청년의 머리카락을 부여잡고는 마구 때렸다. 청년은 어이구 어이구 소리만 지를 뿐 전혀 반격을 하지 못하고 맞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청년이 체격도 더 좋으면서 말이다. 어느새 구경꾼이 도로를 가득 메웠다. 얼마 후 경찰이 오자 승용차 주인은 오토바이 청년을 경찰에 넘기며 오히려 큰 소리를 친다.
내가 보기에도 분명 승용차가 잘못하였는데 모든 상황이 거꾸로 돌아가기에 의협심이 발동하여 내가 나서고 말았다. 경찰에게 다가간 나는 처음부터의 상황을 설명하고 승용차 주인을 가리키면서 잘못은 저 사람에게 있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주위의 몇 사람이 오토바이 청년은 잘못이 없다고 몇 마디 거들었다. 그때서야 경찰은 오토바이 청년을 놓아주고는 승용차 주인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왜 청년이 잘못도 없이 구타를 당하면서도 상대에게 대들지 못하였는지 너무 궁금하여 변호사 친구 소디에게 물어보았다. 소디는 계급사회의 풍토때문이라고 했다. 인도인들은 서로 이해가 상충될 때 우선 상대가 나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하고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무조건 죽은 시늉을 하며 대들지 않는다. 이것은 거의 본능적이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누가 상위 카스트인가, 누가 사회적으로 강자인가를 우선 살펴보기 때문에 결론은 이미 난 것이며 그러기에 싸울 일은 별로 없다. 북인도의 뉴델리에서는 거의 보지 못한 거리에서의 언쟁을 남인도의 첸나이에서는 가끔 목격하곤 했다. 북인도보다는 남인도가 조금 더 인간적인 사회여서일까?
![]() |
↑↑ 중류층 가정에 일하러 온 하인의 맨발 |
ⓒ 양산시민신문 |
이웃 사람은 나와 다를 수 있다
1990년 3월, 뉴델리 무역관에 발령을 받고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의 일이다. 저녁에 퇴근해서 돌아오는데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 정우가 옆집 인도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정우가 영어도 아직 못하는데, 아이들끼리 말이 통할까? 하는 의구심으로 관찰해 보았다. 생각보다는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잘 놀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정우에게 물어보았다. “너 인도아이들과 어떻게 이야기하니?” 하니까 “그냥 말해” 당연히 우리말로 한다는 대답이다. “옆 집 애는 무슨 말로 너에게 얘기 하니?” 하니 “몰라” 한다. 인도 아이들이 힌디와 영어를 번갈아 사용하는 것을 지나가면서 들어서 나는 알고 있었지만 정우는 무슨 말인지 알 리가 없다.
내가 살았던 곳은 사프다르장이라는 곳이었다. 오른쪽 집에는 아리안 계통으로 피부가 희고 힌두교도이며 힌디어를 사용한다. 왼쪽 집에는 펀자비로서 키가 크고 활달하며 시크교도이고 펀잡어를 사용한다. 우리 집은 황인종으로 불교도이고 한국어를 사용한다.
이렇게 인도인들은 어려서부터 집 밖을 나가면 자기와 생김새도 다르고 말도 다르며, 종교도 다른 아이들이 친구가 되어 어울린다. 이처럼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 아주 평범한 일상이다. 어릴 때 나와 같은 생김새, 같은 말을 사용하는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혹 외국인이라도 나타나면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그들을 주시하던 생각이 난다. 우리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외국인에게 보이지 않는 마음의 담을 쌓는다. 아니 우리끼리도 나와 생각이 다르면, 다름 자체를 인정하기보다는 ‘틀렸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다르다’는 말과 ‘틀리다’는 말을 구별없이 사용하는 것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자기와 당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면 죽기 살기로 대립해 싸운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흑백의 이분법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나와 다르면 적으로 보고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글로벌 사회는 어디를 가든 나와 다른 사람이 다른 생각과 다른 문화를 가지고 살아간다. 비슷한 수준의 한국과 인도 학생이 똑같이 미국에 유학하면, 한국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며 생활한다. 그런데 인도 학생은 미국에서 옆집 사람이 생김새·말·종교 등이 다른 것이나, 인도에서 옆집 사람들이 다른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 이질적인 것을 열린 마음으로 손쉽게 받아들이고 거부감 없이 그들과 어울리고 생활해 나간다. 글로벌 경쟁사회에서 인도인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요인의 하나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점이 아닐까?
![]() |
↑↑ 현지인이 오른손으로 식사하는 모습 |
ⓒ 양산시민신문 |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문화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숟가락, 젓가락을 사용하지만 인도인은 오른손을 사용한다.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고 나서 우리는 휴지를 사용하지만 인도인은 왼손을 사용한다. 인도 여자들이 입는 사리와 우리가 입는 옷을 비교해 보자. 사리는 폭 1미터 정도의 천으로 길이는 6~10미터 정도나 된다. 우리가 입는 옷은 디자인을 하고 자르고, 바느질을 하여 입는 데 반하여 사리는 이러한 인공적인 행위는 필요 없이 그대로 사용하면 된다. 이처럼 인도인은 바느질 같은 인위적인 행위를 가하거나 숟가락 등의 매개체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이 자연에 직접 접촉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매개체 없이 직접 하나가 되는 개념은 종교에서도 볼 수 있다.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다니는 자이나교 종교지도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아주 엄격한 채식주의자로서 동물은 물론 심지어 식물의 살생까지도 금하기도 한다. 신전에 들어갈 때 신발, 양말을 모두 벗는 것도 이런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문화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 |
↑↑ 여성용 화장실 표시 디자인 |
ⓒ 양산시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