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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 ||
ⓒ 양산시민신문 |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에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한 뒤 일본정부의 탄압을 피해 그 해 4월에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그 뒤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으로,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어려운 재정문제 해결에 주력해 왔다.
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도산 안창호와 같이 주식자금 모집의 발기인이 되었고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기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같은 해 ‘증한국민호조사’를 결성하여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여 실천할 것을 건의하는 등 임시정부 주요 요인으로 독립운동을 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다 1921년 9월 17일 상해에서 과로로 순직했다.
윤현진 선생 재조명 논의
윤현진 선생이 순국한 후 상해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상해 외인묘지묘소에 안장하여 그의 형인 윤현태 선생께서 “윤현진 묻음”이란 비석을 세웠고 1995년에 그의 유해를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우리 양산에서는 1959년 춘추공원에 기념비를 건립하여 보존하고 있고 2009년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부조에 이름을 새겨 해마다 추모하고 있다. 춘추원 삼조의열단 안에 자그만 비석이 세워져 있지만 해마다 지내는 향사는 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독립운동가와의 형평성때문이다. 이제 충렬사가 완성되어 독립운동가가 모두 모셔지면 함께 제향할 것이다. 또 2005년 양산문화원에서 그분이 태어난 상북면 내전 마을입구에 윤현진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라는 간판을 세우고 생가인 지금의 주택담장 밖에 표시 간판을 세워 그분이 태어난 생가터임을 알리고 있다.
최근 들어 윤현진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을 재조명하면서 기념사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가운데 생가 복원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볼 때 상북면 내전마을 주변이 공업지역으로 고시되어 이미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 있고 장차 마을형태의 변화가 예상되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윤현진 선생의 할아버지는 구한말 높은 벼슬을 한 관료출신으로 집이 매우 부유하였는 바 그 생가의 규모가 대단히 클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복원에 따른 막대한 비용과 사후관리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춘의숙 자리 찾아 기념관을
현재 이 생가터에는 붉은 벽돌 2층 양옥으로된 아주 멋진 주택에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그 집의 담장 밖에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고 세워놓은 간판도 너무나 초라해 보이고 실제 살고 있는 사람한테도 그리 기분 좋은 간판이라고 보기 힘들다. 지금 살고 있는 집주인에게 부담만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는 부산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벽산 안희제 선생의 기념관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벽산 기념관은 지난 1956년 벽산상회가 있었던 자리에 건립해 많은 사람이 그를 기억하여 그분의 독립을 위한 정신을 배우고 있다.
윤현진 선생이 양산에 의춘의숙을 만들어 신문학 교육을 통하여 청년들의 눈을 뜨게 하고 의춘양행을 설립하여 우리 물건을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민족이 빨리 자립할 수 있는 길을 터기 위함이 이분의 정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의춘의숙이나 의춘양행 자리를 찾아 그곳에 자그만 기념관을 세워 이분의 애국정신을 심어 후세에 길이 이어갈 수 있도록 함이 현명한 길일 것이다.
또 다른 독립운동기념물 확충을
양산의 독립운동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그 첫 번째가 앞에서 논의한 윤현진 선생과 같이 각종 단체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이었고, 두 번째는 양산 장날과 신평 장날에 일어났던 3.1 독립만세운동, 세 번째는 양산농민운동 즉 농민들의 일본경찰서 습격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첫 번째 윤현진 선생에 대하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념관을 건립하여 후세교육의 장으로 삼았으면 한다. 3.1운동의 경우 옛날 양산 장터 자리에 천성라이온스클럽이 4년 전 조그마한 표지석을 설치했지만 다소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이 곳에 좀 더 실감나는 조형물을 제작 설치하여 기념물이 보완되어야 할 것이고, 하북 신평에도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조형물이 세워져야 한다.
양산농민운동은 당시 전국에서도 그 규모가 대단히 크고 일제에게 준 충격이 대단했던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일본경찰서 자리인 양산장애인협회 건물 내의 공지에 그 때를 상징할 수 있는 조형물과 표지석을 만들어 후세에 길이 알리는 노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이렇게 역사성이 있는 기념관과 각종 조형물을 설치함으로써 양산 구도심의 품격도 높이고 지역의 활성화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