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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홍 농부시인 본지 객원칼럼니스트 | ||
ⓒ 양산시민신문 |
강연이 오전이라 아침 일찍 서둘러 나섰는데, 마을 어르신이 경운기가 논바닥에 처박혀 어찌할 줄 모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과 힘을 모아 경운기를 건져냈습니다. 어쨌든 겨우 강연 시간을 맞추어 학교에 닿았지요. 고물 짐차를 학교 밖에 세워두고 걸어서 교문으로 들어가는데, 교문 앞에 교사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열두세 명 서 있었습니다. 누굴 기다리나보다 싶어 그 앞을 지나갔지요. 가끔 학교 강연을 가면 맨 처음 담당 선생이 나를 데리고 가는 곳이 교장실입니다. 그래서 담당 선생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잘 되지 않아, 지나가는 학생한테 물었습니다.
“학생, 혹시 000 선생님 어디 계신지 모르나?” “예에! 우리 도서관 선생님인데요” “도서관 선생님은 지금 어디 계시냐?” “어, 저기 교문 앞에 오늘 강사 선생님 마중 나가셨는데요. 다른 선생님들과 같이요” “그래, 내가 오늘 강사인데 누굴 기다리시나?” “아아, 그러세요! 제가 얼른 가서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제야 선생님들이 부랴부랴 달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이고오, 아까 교문 앞을 지나가는 걸 보았는데 몰라 뵈었습니다. 설마 서정홍 선생님인 줄 모르고…”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설마 서정홍 선생님이 고무신을 신고, 낡은 생활한복 바지에 흙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날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선생님은 오늘 어떤 사람을 강사로 부르셨습니까? 고급 승용차를 타고,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빛이 나는 구두를 신고 나타날 강사를 부르셨습니까?” “아아,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농사지으며 시를 쓰는 농부 시인을 불렀습니다” “농사철에, 농부가 이런 차림으로 학생들을 만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새벽에 일어나 비설거지하고 논두렁에 빠진 경운기 건져내고 오느라 겨우 시간 맞춰 왔습니다. 너무 급하게 닿아서 미안합니다” “아이고오, 아닙니다. 저희들은 그것도 모르고 교문 앞에서 기다렸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농부로 산 지 이제 겨우 칠팔 년밖에 안 되지만, 여태 모르고 살았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그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우선 겉을 보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버릇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붙었구나 싶었습니다.
하기야 햇볕으로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바쁜 농사철이라 살은 빠졌지, 옷차림은 거지꼴이었으니 누가 나를 강사로 맞이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홀딱 벗어놓고 보면 다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몸뚱이에 무엇을 걸치느냐에 따라 ‘사람대접’이 달라지는 세상이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농부가 되고부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어찌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어떤 학교에 강의를 가면 이런 내 차림새를 보고 강사 선생 맞느냐고 묻는 교장 선생도 있고, 학생들한테 농사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많이 해 달라는 교감 선생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농부를 귀하게 여겨, 바쁜 일정 다 뒤로 미루고 한두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서툰 내 얘기를 듣는 교장 선생도 있지요. 그런 분을 만나면 사는 맛이 납니다. 그날 저녁엔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지요. 이런 마음이 드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싶습니다.
나는 가끔 하찮은 일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어찌 내 뜻대로 되겠습니까? 만일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수월하게 이루어진다면 사람이 얼마나 거만해지겠습니까? 험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뜻대로 안 될 때가 더 많을 것이고, 그때마다 내 뜻과 다른 사람들을 스승으로 삼아, 내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만히 지난 삶을 뒤돌아보면, 더구나 도시에서 살아온 사십 년을 뒤돌아보면, 참 바쁘게 살았구나 싶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이제는 자연 속에서, 새처럼 자유로운 삶을 누리며, 죄를 덜 지으며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