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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북면 삼수리에 있는 삼장수 생가터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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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 ||
ⓒ 양산시민신문 |
조선의 개국공신이던 김종서 장군의 휘하에 있다가 그의 뒤를 이어 함길도 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바로 그 이유로 수양대군으로부터 제거대상 1호로 지목된다. 수양대군에 의해 파직된 뒤 한양으로 오는 길에 수양대군의 음모임을 알아챈 이징옥은 병력을 이끌고 단종 복위를 위한 준비를 하다가 관군의 습격을 받고 가족이 몰살되는 비운을 겪는다.
단종실록에는 이때 그가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하고 도읍까지 설정했다 하지만 세조의 추종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 믿음성이 없다. 일명 ‘이징옥의 난’으로 알려진 반란은 수양의 정변에 대항한 단종 복위운동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과 영월 장능 단종 배식단 사우에 사육신과 더불어 충신으로 모셔지고 있음은 이를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징옥(李澄玉 1399~1453)은 하북면 삼수리에서 태어난 소년장사였다. 그의 삼형제 모두가 강골로 당시 무과(武科)에 모두가 급제한 무인이었다.
양산 이씨 시조의 탄생
징석, 징옥, 징규 삼형제의 아버지 이전생(李全生)은 고려 때의 명문인 인천 이 씨로 당시 유명한 풍수지리학자였다. 고려 말에 지방을 다니면서 민심수습을 맡은 순무어사(巡撫御使)의 직위에 있었는데 왕명을 받들어 전국을 순찰하던 중 1380년 경 지금의 하북면 삼수리에 이르러 명당임을 알고 정착해 딸 둘과 아들 셋을 두었다.
삼형제가 성장할 때 많은 전설을 남겼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호랑이를 타고 글공부를 다녔다고도 하고, 하루는 서당에서 돌아오다 오십여명의 도적떼를 발견하고 삼형제가 힘을 합해 몽땅 소탕하니 이후 이 고을은 삼형제 장수가 있다하여 도적 없는 태평고을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삼형제는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으로서 최고 품계인 종일품에까지 올라가 삼형제 장수가 났다하여 마을 이름도 삼수리(三帥里)가 됐다.
이전생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을 세운 공신으로 태조 7년(1397)에 공조전서라는 관직을 역임한 바 있고 이때 받은 왕지(王旨)는 보물 제1101호로 지정돼 현재까지 후손이 생가에 보존하고 있다. 이전생이 99세를 살다가 죽었을 때 세종대왕은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을 내리고 왕능에 버금가는 석분묘를 명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양산 이 씨가 탄생하게 되었다.
세조의 신임을 받은 이징석
장남 이징석(李澄石 1395~1461)은 17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일찍부터 내금위장(內禁衛將)이 되어 궁중을 호위하면서 왕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또한 태종 16년(1416)에 보위장군 대호군자(大護軍者)가 되었고 승승장구하여 세종 14년(1432)에는 종이품인 가정대부동지중추원사(嘉靖大夫同知中樞院事)의 품계에까지 올랐다.
세종 15년(1433)에는 서북 변방의 사군 설치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파저강전투에서 도원수(都元帥) 최윤덕(崔潤德)장군의 부장(副將)이 되어 용맹을 떨친 수훈장이 되었다. 이때 내린 세종의 교지가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생가에 보존되어 있다.
단종 원년(1453)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인 계유정란(癸酉靖亂) 이후 동생 이징옥도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조정대신들이 이징석을 죽여야 한다고 13차례나 상소하였음에도 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세조로부터 큰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징석은 세조 4년(1459) 4월에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세조는 그 공덕을 치하하면서 종일품인 숭록대부(崇祿大夫) 양산군(梁山君)으로 책봉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지 3년 되던 해 66세로 생을 마쳤다. 이징석이 죽자 왕이 직접 제문을 지어 보내고 장강(莊剛)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는데 이때 보낸 제문 역시 국보로 지정되어 생가에 보존되어 있다. 이징석의 무덤은 양산 명곡동에 있다.
북벌영웅인가, 반란수괴인가
차남 이징옥(李澄玉)은 1399년 하북 삼수에서 태어나 1453년 54세의 나이에 북쪽변방 종성에서 부하장수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어릴 때 앞서 도적떼를 잡는 것 말고 또 다른 전설이 있는데 14세 때 멧돼지를 3일간이나 추격하여 살아있는 채로 집으로 몰고 와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7세(태종16년)에 무과 별시에 일등급제하여 김종서(金宗瑞)와의 인연을 맺었고 특히 육진개척 때에 김종서와의 관계는 친부자(親父子)처럼 서로 아껴주었다고 한다.
이징옥은 그후 절제사(節制使)가 되어 북쪽 국경선에서 여진족을 토벌해 가는데 큰 업적을 세웠고 세종대왕의 육진개척 정책의 일등공신으로 20여년 동안 북방에서 우리 땅을 되찾고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단종 원년(1453) 계유정란(癸酉靖亂)이 일어나자 여진족이 이징옥을 추대하여 대금황제에 올랐으나 죽임을 당한다. 그후 세조는 이징옥을 두고 “지금은 반역을 한 신하이지만 후세에는 너를 두고 충신이라 할 것이다”(今世之亂臣後世之忠臣)고 했다.
이징옥의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아들을 당시 유모(乳母)가 데리고 고향쪽으로 내려와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곳이 경주시 외동면 신계리다. 이곳은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고 제실을 지어 매년 향사를 지내고 있다.
금정산 마애불상의 주인공(?)
삼남 이징규(李澄珪 1403~1468?)는 삼형제 중에 가장 많은 전설을 남기고 있다. 5살 때 돌을 업어다 논 가운데 두고 평소 입었던 갑옷을 보관하였다 하여 갑옷바위의 전설이 있고, 집 근처에서 활쏘기를 즐겨하던 활소대가 있다. 나라에서 하사받은 말을 시험하기 위하여 화살을 쏘아올린 후 그 화살을 쫓아 말을 타고 달려갔는데 마을앞 다리 위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가지 않고 말이 서서 맴돌기만 했다. 주변을 살폈으나 화살이 보이지 않아 화가 나서 그만 말의 목을 쳤다. 잠시 후에 화살이 도착했다. 이징규는 자기의 경솔한 행동을 크게 뉘우치고 말이 먼저 도착했다고 그곳에 도마비(到馬碑)를 세웠다. 그때부터 그 다리를 도마교(到馬橋) 라 불렀고 지금도 그 교량난간 지주에 도마교라 새겨져 있다.
또한 부산시와 양산시 경계지점인 금정산에 금봉탕이 있다. 행정구역으로 양산시 동면 가산리 산 1번지 이다. 이곳은 수직바위 벽면에 음각으로 인물상이 그려져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징규 장군이 이곳에서 글공부하고 무예를 닦았다 해서 그 아호인 금봉의 이름을 따서 금봉탕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경상남도 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된 마애여래불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는 좀더 전문가의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바위에 새겨진 인물이 부처님과는 좀 다르고 복장도 장군복에 가깝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징규는 세종 2년(1420)에 무과에 급제한 후 판관감찰직(判官監察職)을 지냈고 이징옥의 동생이라는 관계로 대신들로부터 여러차례 연좌주살(緣坐誅殺)을 상소당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이징규는 종1품의 신분까지 올라 무인으로써 최고의 품계에 올랐으나 말년의 생은 기록이 없다. 그의 무덤은 창녕군 장마면 유리에 있었는데 무슨 연유 인지 무덤이 파손되고 없다고 한다. 그 후손도 어디 있는지 몰랐으나 최근 인천 이씨로 살아가고 있는 후손을 찾았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
선조의 발자취 문화유적 관리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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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수에 관한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다. 아직도 생가가 있고 그 후손이 600년 넘게 그 곳에서 살고 있다. 또 그 곳에는 장군샘, 갑옷바위, 활소대, 도마교 등 전설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남아있다. 이 일대를 양산시가 매입을 해서 생가도 복원하고 기념관도 짓고 전설에 등장하는 장소도 복원하고 또한 삼장수의 활동상을 한곳에서 볼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테마공원으로 가꾼다면 훌륭한 문화유적이 되고 학생들의 교육의 현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때에 맞추어 양산시에서 삼장수 생가터에 대한 유적지 조성사업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있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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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징옥 제실 뒤뜰에 있는 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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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외동면의 이징옥 제실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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