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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농부의 세상사는 이야기]거룩한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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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농부의 세상사는 이야기]거룩한 숙제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1/07/19 10:30 수정 2011.09.06 10:42



 
↑↑ 서정홍
농부시인
본지 객원칼럼니스트
ⓒ 양산시민신문 
십 년 전, 농부가 되려고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자동차와 기계를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농사지으려면 짐차가 꼭 필요하다며 동서가 중고 짐차를 선물로 사 주었습니다. 짐차가 없을 때는 인터넷을 쓰기 위해 우체국까지 사오십 분 남짓 걸어서 가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걸으면서 여기저기 핀 들꽃을 바라보기도 하고, 바람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온갖 풀벌레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걷다보면 살아 있는 모든 게 길동무 같아, 가진 게 없어도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짐차가 생기고부터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오직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꽃을 볼 여유도 없고, 자동차 엔진 소리 때문에 새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무릅쓰고 짐차 한 대쯤 있어야 노인들이 아프면 병원에 모셔가고, 장날에 함께 가서 무거운 짐도 실어다 드리고, 거름이나 곡식도 옮길 수 있다면서 이런저런 핑계로 짐차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정홍이란 인간도 ‘사람’이 되려면 한참 멀었구나 싶습니다. 아래 시는 윤석중 선생이 쓴 ‘소’라는 시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 느릿느릿 먹는 소. // 비가 쏟아질 때도 / 느릿느릿 걷는 소. // 기쁜 일이 있어도 / 한참 있다 웃는 소. // 슬픈 일이 있어도 / 한참 있다 우는 소

나는 소처럼 여유롭게 살지 못하고 여태 너무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지난 삶을 뒤돌아보는 것조차 시간이 아까웠고 시간을 돈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걸음도 빨리 걷고, 생각도 빨리 하고, 그 생각만큼이나 말도 빨라졌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았습니다.

‘어른’이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어른은 많지만,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어른은 많지 않습니다. 이런 어른들은 대부분 성공해야만 행복이 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행복을 잡기 위해 앞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달려갑니다. 그런데 행복은 잡으려 할수록 멀리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다른 사람과 견주며 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견주며 사는 것은 곧 자신을 모욕하고 학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사는 것이지요.

셋방살이를 하거나 밥을 한두 끼 굶더라도 지금 행복하면 성공한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재산이 많다 해도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많이 웃으면 행복이 온다고. 그러나 억지로 웃는다고 행복이 오지 않습니다. 행복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이지요.

‘경제논리’에 넋을 빼앗긴 사람들은 수천 년 우리 겨레를 먹여 살려온 논과 밭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농사는 풍년이 들어도 그만, 흉년이 들어도 그만입니다. 왜냐하면 자동차와 휴대폰 따위를 수출하여 벌어들이는 돈으로 중국이나 미국에서 곡식을 사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생들도 농민이 아무리 어려움을 겪어도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이제 농민의 아들딸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영혼이 맑아 정의심에 불타오르던 대학생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떨쳐 일어나 제 한 목숨 아끼지 않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농민이니 농촌이니 이런 말은 그저 머릿속에 그려질 뿐 아무런 추억이나 감동이 없습니다. 모두 도시 시멘트 건물 안에서 태어나 시멘트 건물에 둘러싸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른이고 대학생이고 가리지 않고 농촌이 무너지고 자연이 오염되는 줄도 모르고, 때론 알면서도 모른 척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듯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가 어지럽힌 세상은, 이제 아무 죄 없는 어린이들이 모두 짊어지고 가야 할 몫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분명하게 아는 것과, 분명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다를수록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거짓과 위선뿐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똑똑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입으로 온갖 좋은 말을 떠벌리며 먹고사는 사람들보다 온몸으로 땀 흘리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세상,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거룩한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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