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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깐치뿌람사원 내부. 관람객들이 맨발로 사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
ⓒ 양산시민신문 |
가정부 월급에 대한 옆집 주민의 반발
인도 상층민이 하층민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북인도 뉴델리의 단독 주택에서 생활할 때는 몰랐다가 남인도 첸나이에서 경험한 일이다. 우리 집 가정부 셀비는 옆집 인도인이 소개해 주었다. 자기 집에서 일하던 두 명의 가정부 중에서 하나를 내보낼 계획이었는데 우리 집으로 보낸 것이다.
그는 자기 집에서 월 400루피를 주었으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집사람은 오전 9시부터 4시까지 일하는데 한달 400루피(1만원)는 너무 박하다고 생각해 좀더 생각해 주기로 했다. 3년 전 뉴델리에서는 2천루피를 주었던 것이다. 뉴델리에서는 쿼터라고 하는, 집에 딸린 독립공간이 있어 가정부 가족은 거기에 거주했다. 따라서 24시간 아무 때나 부를 수 있었다. 그런 차이는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400루피는 너무 적다고 생각한 것이다. 집사람은 첫 달에 600루피를 주고 셀비가 일을 열심히 잘하자 다음 달에는 800루피로 올려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였다. 셀비가 옆집 가정부에게 자기 월급이 두 배가 되었다고 자랑한 것이다. 우리에게 가정부를 소개해준 옆집 주인이 찾아와서는 한 번에 월급을 그렇게 많이 올려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졌다. 자기가 400루피를 주고 있었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우리가 그들 사회의 룰을 깨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 사람들이 남한테 싫은 소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말투는 조용조용 했지만 인도인이 이 정도로 남한테 심각하게 이야기 하는 것을 보니 작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디왈리 축제가 얼마 지나지 않아 보너스를 포함해 두 달 치를 미리 주었다고 둘러댔다. 다음날 셀비를 불러 800루피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입단속 했다. 그러나 셀비의 월급은 이후에도 계속 올려주었다.
축제 보너스의 배달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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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운용 한국외대 인도어과 한국외대 지역대학원 정치학 석사 인도 첸나이무역관 관장 한국인도학회 부회장(현) 영산대 인도연구소장(현) 영산대 인도비즈니스학과장(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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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총 12세대이다. 정방형의 4층 건물인데 가운데는 천정까지 빈공간이다. 고용인은 총괄 관리인1명, 경비원 3명, 전기기술자 1명, 청소원 2명, 정원사 1명, 기타 1명 등 총 9명이 있다.
디왈리 축제가 임박해 약 2천 루피(우리 돈 5~6만원)를 준비한 다음 경비원 등이 모인 자리에서 총괄 관리인에게 9개의 봉투를 주면서 (금액은 당연히 달랐다)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문제가 생겨 전기기술자를 불렀다. 그때 전기기술자가 보너스를 받지 못하였으니 자기도 달라고 했다. 인도인 하층민들은 이런 이야기를 별 거리낌 없이 한다. ‘아, 배달 사고가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즉시 주머니에 있던 100루피를 꺼내 주었다.
그런데 일분도 되지 않아 이층에 사는 아파트 주인이 찾아 왔다. 그는 전기기술자를 내보내고 나한테 항의를 했다. 맞은편 이층에서 보니까 내가 돈을 주던데 일을 시키면서 돈을 주면 버릇이 나빠지니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주문했다. 나는 디왈리 보너스를 미처 주지 못해 오늘 준 것이라고 했지만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처럼 인도 상층민들은 하층민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조그마한 빈틈도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생활화되어있다. 카스트 사회에서 하층민으로 산다는 건 정말 힘들 것이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길 모르고 말 모르는 렌터카 운전기사
한 번은 첸나이 남부의 마하발리 뿌람이라는 유적지를 가기위해 렌터카를 빌렸다. 그런데 차를 탄지 두 시간이 되어도 아직 시내를 돌고 있어 기사에게 물어보니 오분이면 도착한다는 것이다. 오분 후 내려보니 아무래도 이상해 다른 인도인을 붙잡고 물어보니 애초 출발한 곳에서 2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조그만 사원이었다. 마하발리뿌람은 그곳에서 1시간 반 정도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결국 두 시간 동안 남쪽으로 전혀 가지 못한 것이다. 기사를 닥달해 이유를 물어보니 내가 목적지를 잘못 말해주었기 때문이란다. 출발할 때 지도까지 보여주며 설명했건만. 결국 내가 직접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3시간 이상이 걸려 다녀왔다.
돌아와서 기사에게 다시 물으니까 자기는 뭄바이에서 첸나이에 온지 일주일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길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시내 길도 나보다도 모르고 더욱이 첸나이에서 사용하는 타밀어를 전혀 몰라 내가 영어로 길을 물어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렌터카 주인에게 따지자 기사가 모자라서 그랬다면서 그래도 운전은 잘하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인도에서는 모든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것이다. 렌터카는 가능하면 타지 않는 것이 좋다.
한 번은 공용차가 정비소에 들어가서 렌터카를 임대했다. 그날은 밤 12시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렌터카 운전사에게 팁을 주려고 보니 잔돈이 없었다. 100루피 짜리를 주면 장기적으로 더 큰 문제이므로 그날 만큼은 모른 체 하기로 했다. 운전일지에 사인을 해주고 돌아서려니 기사의 불만스런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거 문제가 생기겠구나’ 뉴델리 때부터 훈련된 동물적 느낌이 왔다. 그러나 어쩌랴 ‘내일 아침 7시 반’까지 라는 요청만 두세 번 반복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 렌터카는 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렌터카 사장에게 전화로 항의했으나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 지금이라도 다른 운전기사와 에어컨 없는 차를 보낼까 하는 태평한 대답만 메아리쳐 온다. 조금 귀찮더라도 집에 들어가서 20루피라도 가져다주었다면 다음날 아침 편했을 텐데.
신발을 잃어버렸다
인도에서는 힌두사원에 들어갈 때 신발뿐 아니라 양말까지 벗어야 하는 곳이 있다. 깨끗하지 않은 바닥을 맨발로 걷자니 피부감촉이 민감한 사람들은 마땅치 않아 한다.
몇 년 전 동국대 김선근 교수가 델리에 교환교수로 와 있었다. 그 분을 중심으로 불교 신자들의 모임이 결성되어 여러 활동을 했다. 4월 초파일이 되어 마하보디라고 하는 불교사원에서 모임을 갖고 탑돌이를 했다. 당시 이정빈 대사님도 참석했는데 행사를 끝내고 나오니 신발이 없어졌다. 이때 누군가의 해석이 걸작이었다. 그날 모임에서 가장 높은 분의 신발을 가져가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다나. 재치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바꿔주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인도 최남단 바닷가 깐냐꾸마리라는 유적지에서 간디기념관에 들어갈 때였다. 2루피 정도 주고 신발을 맡겨야 했다. 보관하는 곳이 너무 허술하고 혼잡스러워서 나갈 때 제대로 찾을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기념관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와서 신발을 찾으니 없어지진 않았다. 그런데 다른 여행객의 신발이 없어져서 보관소 사람과 언쟁을 하는 것이 보였다. 우리끼리 웃으며 ‘우리는 신분이 낮아서 안 잃어버렸다’하면서 사원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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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밀나두 주의 주도(州都)이자 남부 인도 최대의 도시 첸나이의 시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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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첸나이에 있는 카팔리스와라르 사원의 외벽 조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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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최남단 깐냐꾸마리의 비베가난다 섬에 있는 조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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