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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 유일의 사액서원인 송담서원, 물금읍 가촌리에 있다 |
ⓒ 양산시민신문 |
물금읍 가촌리에 가면 송담서원이 있다. 그곳은 송담 백수회 선생의 충의를 기리고자 1714년(숙종 40년)에 세워 1717년(숙종 43년)에 편액을 하사한 양산의 유일한 사액서원(조선시대 국왕이 편액(扁額)·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해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 편집자 주)이다.
송담 선생은 1696년에 양산 충렬사에 조영규군수와 함께 배향되었다가 문중에서 서원을 별도로 세워 그곳에 배향하였으며, 지금의 송담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다가 1986년에 새로 중건한 것으로 양산유림에서 매년 한 차례 향사하고 있다.
송담 선생이 돌아가시고 28년이 지난 후인 1670년(현종 11년)에 나라에서 통정대부 호조참의라는 벼슬을 증직(贈職)하였는데 이렇게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을 가자(加資)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생이 살았던 곳을 가자방(加資坊)이라 했고 그 가자방이 변해서 지금의 가촌리(佳村里)가 되었다.
“죽어도 왜구의 신하가 되지 않으리”
선생은 1574년(선조 7년)에 동면 사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부여(扶餘)이고 호는 송담(松潭)이다. 10대 초반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장하였으나 학문을 배우고 행하는데 힘썼고 어렸을 때부터 지기(志氣)가 남들에 비해 뛰어 났다고 한다.
선생의 나이 19세 되던 해인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에게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9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였지만 고국에 대한 충절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왜인을 감탄케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적의 우두머리가 선생의 풍골이 초범(超凡)함을 보고 협박하여 굴복을 시키려 했으나 분한 욕설로서 저항하며 굴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선생은 자신의 왼쪽 팔뚝에 ‘영위이씨귀 부작견양신(寧爲李氏鬼 不作犬洋臣 차라리 이 씨의 귀신이 될 지언정 견양의 신하는 되지 않으리라)’는 글을 쪼아 새기니 적의 우두머리가 더욱 노하여 가마솥에 물을 끓여놓고 삶아 죽이겠다고 했다. 선생은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옷을 벗고 가마를 향해 가며 “이것은 내가 원하는 바라”하니 적의 또 다른 우두머리가 바삐 나와 말리면서 하는 말이 “이는 참으로 의사(義士)로다, 어찌 명분 없이 죽이리요” 하며 모두가 그 충절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도리어 적으로부터 존경을 받다가 1600년(선조 33년) 억류된지 9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선생의 나이 27세이며 지금의 물금읍 가촌에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당시 이곳의 지명을 백의사리(白義士里)라고도 했다고 한다.
광해군의 폐비 청원에 분연히 대항하다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1608~1623)은 후궁 소생으로 일찍 어미를 여의고 부왕인 선조의 냉대 속에 자랐다.
임진왜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으나 당시 조정에 팽배하던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됐다. 광해군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큰 권력을 쥐게 된 대북파의 우두머리 이이첨이 선왕이 뒤늦게 본 적자인 영창대군과 광해군의 형 임해군, 그리고 계모인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까지 제거하면서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사주한다.
1613년(광해 5년)에 계통상으로 광해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들고 나와 추종자 무리들이 작당하여 전국 유생들로 하여금 모후(母后)인 인목대비를 폐위토록 하는 청원(請願)을 하되 따르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통문을 전국에 내렸다. 이를 접한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천하에 어찌 모후(母后)없는 국가가 있으리오, 윤기(倫紀)가 길을 잃었으니 어찌 인륜(人倫)이 있다 하리오, 내 차라리 몸소 화를 당할지언정 이와 같은 흉역지서(凶逆之書)로 더 이상 사람의 이목(耳目)을 더럽힐 수 있으리오”하고는 곧 그 글을 찢어 없애고 말았다. 이로써 그 글은 양산의 유림들에게 전달되지 못하였고, 사람들은 이를 보고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오직 선생은 태연자약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의 나이 40세에 있었던 일이다.
이로 인해 점차 명사들과 교류의 길이 트이고 잠시 벼슬길에 나가기도 했는데, 1623년 인조반정 후 사옹원 참봉에 임명됐으나 사퇴하고 예빈시참봉을 지낸 후 자여도 찰방을 지냈다. 그러나 1628년(인조 6년) 상소를 올린 것이 각하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학에 힘썼다.
단심과 효심 가득한 문학작품 여럿 남겨
선생은 왜국에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고독한 마음을 시편이나 가사로 글을 지었으며, 오늘날 한시 11수, 서적 1권, 편지 1통, 국문시가 4편이 전해오고 있다.
국문시가 4편은 도대마도가(到對馬島歌), 재일본장가(在日本長歌), 단가(短歌), 화경도인안인수가(和京都人安仁壽歌)로써 모두 일본에 억류되어 있을 당시 고국에 대한 우국충정의 내용을 담고 있는 단편의 가사(歌辭)들이다. 재일본장가(在日本長歌)는 술회가사(述懷歌辭)로 백수회선생의 나라를 위한 단심(丹心)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효심(孝心)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송담 선생의 국문시가는 타국에서의 조국애가 서려 있는 몇 안되는 우리 민족의 애국시이며, 박인로(朴仁老)의 가사들과 함께 임진왜란기의 가사문학에 있어서 공백기의 맥을 이어주는 국문학사적 의의와 적지에서 불굴의 우국충정을 노래했다는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후에 충신을 정려하는 비각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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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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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년(현종 11년)에 선생에게 통정대부 호조참의를 추증(追贈)할 때 충신정려(忠臣旌閭)를 건립토록 명하였으므로 이곳에 충신정려비각을 세웠고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 마다 옷깃을 여미고 지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수시미걸, 혹은 택미걸이라고 했다고 한다.
1848년(헌종 14년)에는 선생의 일대기와 공적을 기록한 묘정비(廟庭碑)와 비를 보호하는 비각을 세웠다. 이 비각은 지난 2009년 경삼남도 문화재자료 제46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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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담서원 안에 있는 충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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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0년(인조 8년)에 승의랑 자여도찰방으로 제수받았다. 사진은 호조의 사령을 알리는 교지(敎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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