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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6.25전쟁 최초의 민간인 학살, 국민보도연맹 사건
“국가로부터 두 번씩이나 학살당했다”

엄아현 기자 coffeehof@ysnews.co.kr 399호 입력 2011/10/11 09:38 수정 2011.10.11 09:22
양산국민보도연맹 희생자 첫 합동위령제 개최

유족회, 5.16쿠데타 후 강제해산 뒤 다시 모여




ⓒ 양산시민신문


1950년 8월 20일 남편은 무자비하게 살해당했다. 아무런 죄도 없이, 한마디 항변도 못하고, 재판도 받지 못 한 채 동면 사배골짜기로 끌려가 국가로부터 살해당한 것이다. 당시 꽃다운 24살이던 양귀순 할머니는 그렇게 남편을 가슴에 묻고 60여년을 살아왔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악랄한 독재자들은 남편을 2번 죽였다. 이승만 시절 무참히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 박정희 시절 유골이 파헤쳐지고 묘비도 흔적조차 없애 버렸다. 양귀순 할머니가 한 맺힌 가슴의 한을 토해내자 장내는 그야말로 울음바다였다. 양귀순 할머니도 목놓아 통곡의 울음을 터뜨렸다. 


양산유족회, 50년만에 재결성


이처럼 평생 가슴의 한을 품고 살아온 양산사람들이 모였다.

‘양산국민보도연맹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지난 5일 시설관리공단 1층 강당에서 열렸다. 양산국민보도연맹유족회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를 비롯해 150여명이 모였다.

이날 위령제는 양산지역에서 열리는 첫 위령제라고 했지만, 엄격히 말하면 2번째다. 1960년 4.19직후 춘추공원에서 유족들이 유골을 발견하고 ‘양산유족회’를 만들어 희생영령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냈지만,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이를 불법으로 간주해 유족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렇게 강제 해산됐던 양산유족회는 지난해 8월 50년만에 재결성됐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양산국민보도연맹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에 들어가자 97명의 희생자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하지만 유족회는 양산지역에서만 5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가족이 없거나 희생여부조차 모르는 가족들이 다수라는 것이다. 진실규명조차 하지 못하고 역사의 그늘 속에 묻힌 희생자들의 넋도 이날 함께 위로했다.


목화창고 감금, 사배골짜기서 총살


1949년 6월 5일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은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전주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 정부는 당시 정치적 상황과 정권유지를 위해 좌익적인 색체(일명 빨갱이)나 똑똑한 사람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하지만 전쟁과 동시에 이 조직은 이승만 정부의 군인과 경찰에 의해 집단 학살당했다.

양산유족회 증언에 따르면 양산지역에서 학살이 이뤄진 때는 1950년 7월부터 8월까지 몇 차례에 걸쳐 이뤄졌고, 장소는 동면 사배골짜기였다. 당시 보도연맹원들은 학살을 당하기 전 목화창고(현재 중앙동 사무소 근처)에 끌려가 며칠을 갇혀 있었다고 한다.

양산지역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 가운데 보도연맹이 무슨 단체인지도 모르고 가입한 사람이 태반이었다고. 유가족의 증언을 종합하면 당시 보도연맹원 수를 채우기 위한 일종의 할당제가 있었으며, 모두들 별 탈 없을 거라는 생각에 가입도장을 찍었다. 더욱이 도장을 찍지 않았는데도 보도연맹원으로 분류돼 관리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억울한 희생, 지역내 500여명 추정


양산국민보도연맹유족회 황원호 회장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희생자들을 찾는데 혼신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1960년 4.19직후 유족들이 유골을 발굴했을 때 무려 712구나 되는 유골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부산, 김해 등 인근지역에서 끌려와 학살당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500여명의 양산사람들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 회장은 “제 나이 4살 때 가신 아버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제대로 아버지라 불러 보지도 못한 한이 응어리져 있다”며 “이번 위령제를 통해 무고하게 죽음을 맞은 고인들의 명예를 조금이나마 회복시키고 그동안 가족을 잃은 아픔과 동시에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며 살아온 유족들을 위로할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는 1950년 한국전쟁 전후 국가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반인륜적이고 반인권적인 집단학살에 대해 즉각 사죄해야 한다”며 “더불어 유족회는 국가를 상대로 배ㆍ보상을 진행할 것이고,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을 위해 추모탑을 건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양산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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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란?

1949년 좌익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이 조직한 반공단체다. 애초 이 단체의 목적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거나 전향한 자로 분류된 인사들을 빠짐없이 가입하도록 규정해, 그들에 대한 회유와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보도연맹은 1949년에서 1950년 사이 당시 좌익세력을 와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와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 민간인 집단학살을 일으켰고, 이는 북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난 좌익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양산국민보도연맹 희생자 명단

물금읍(40명) 백용덕, 김상용, 노성오, 노재천, 노춘오, 양윤식, 유인규, 안극원, 김도훈, 김재호, 유동무, 배효필, 윤의조, 김성영, 윤도업, 류승열, 오성준, 오이준, 장정수, 장길상, 정진화, 정주일, 정상호, 이금석, 홍종희, 차종록, 차동인, 우낙규, 오말만, 박무수, 박무일, 이상오, 한주학, 강만수, 전경옥, 오철환, 이기우, 이광우, 장천수, 장병옥
동면(31명) 백봉관, 최우식, 우상희, 황억조, 김수영, 김귀영, 김덕영, 김동수, 김달수, 김수덕, 홍종희, 이희태, 김수복, 홍선희, 강신철, 김정규, 박선도, 표명찬, 김보오, 이근우, 이철진, 홍덕희, 안영도, 박재학, 우석주, 윤덕주, 김영창, 김덕관, 김영규, 김영복, 정영진
원동면(7명) 이재규, 배기주, 배효천, 류삼열, 정해갑, 이천호, 이재호
상북면(4명) 지유장, 김재한, 지유천, 김봉률
하북면(5명) 전한식, 김남준, 박상호, 차주선, 강대석
웅상읍(2명) 문창영, 강재복
양산읍지역(8명) 김원준, 황만조, 김대철, 김정수, 박경호, 성경율, 안덕명, 이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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