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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양산의 뿌리를 찾아서-인물로 보는 향토사 ③
소노서원(小魯書院)과 정호인·호의 형제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1/10/18 15:02 수정 2011.10.18 02:49
임진왜란 때의 강건한 선비와 의병장으로 충의정신 빛내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소노마을에 소노서원이 있다. 이 곳은 임진왜란 때 충절을 지키신 소산(蘇山) 정호인(鄭好仁) 선생과 그의 아우인 임란공신 의사(義士) 정호의(鄭好義) 선생 형제분의 위패를 모셔놓고 향사를 지내는 곳이다.

처음 1836년(헌종2)에 소산사(蘇山祠)로 창건하여 군내 유림에서 향사를 지내오다 1868년(고종5) 문을 연 지 32년만에 당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이곳 사당을 폐쇄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78년(고종15) 부임한 이만도 양산군수가 소산선생의 향교 교임의 임무를 다하는데 지극한 사실을 알고 크게 감탄하여 향교약조서(鄕校約條序)를 내려 고을의 선비들과 향교에서 제물을 갖추어 소산선생의 묘제에 참제하여 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51년이 지난 1929년(일제강점기)에 지역유림들의 뜻을 모아 소산사를 복원하여 그 명칭을 소노서원(小魯書院)이라 하고 유림에서 매년 음력 9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은 상의사(尙義祠), 내삼문(內三門), 강당(講堂), 서무(西   ), 취송루(翠松褸) 외삼문(外三門)으로 되어있다.


왜구의 침노 피해 공자위패 옮겨


정호인의 본관은 동래이고 호는 소산(蘇山)이다.

1554년(명종9)에 상북면 소토리 소노마을에서 태어나 1624년(인조2)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71세였다. 소산 선생은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으나 학문을 열심히 익혀 후학을 가르치는데 힘을 써왔으며 당시 국가지도이념인 유교를 숭상하고 공자의 사상을 크게 선양해왔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가 쳐들어와 온천지에 난리가 날 때 소산선생은 양산향교 교임을 맡고 있었다. 양산은 군사도 없고 해서 양산군수 조영규는 동래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싸우다 거기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소산 선생은 본인이 책임지고 있는 향교가 불타거나 파손될 우려가 있음을 우려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향교에 모시고 있던 공자를 비롯한 다섯 성인들의 위패를 안고 나와 십리나 떨어진 물금 신주마을 뒷산 변암(弁岩), 세칭 고깔바위 밑에 봉안하여 예를 올렸다.


신주동 마을이름의 유래가 되다


지금의 물금읍 범어리 신주동의 명칭은 소산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 해서 신주동(神主洞)이 되었다.

1877년에 양산군수로 부임한 이만도군수가 <향교약조서>를 통해서 “정호인이 임진왜란 당시 병화를 피하려고 오성위판(五聖位板)을 감추어 봉안한 곳으로 이로써 동명을 삼았다”고 하였고 “선생의 명성은 길이 신주동이 있어 끝이 없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신주동은 신도시 조성계획에 의하여 마을은 모두 없어지고 그 자리에 경찰서 건물이 들어서 있을 따름이다.


왜구에 끌려가 옥살이하고도 충절 지켜


소산 선생은 향교 오성위판 사건으로 왜구에게 끌려가 9년간 옥살이를 했다. 당시 왜는 조선의 학자나 도예공들을 많이 잡아 갔었다. 그들은 이들을 자기 나라의 신하로 삼으려고 끊임없이 회유했다. 소산 선생도 왜로부터 온갖 협박과 회유를 당하였으나 그때마다 “차라리 머리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항복하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 “너희들이 나에게 항복을 받고자 하거든 속히 나의 머리를 베거라”고 항거하며 충절을 끝까지 지켰다. 
 
소산 선생은 옥중에서도 논어 읽기를 멈추지 않아 왜구들을 감탄케 했다고 한다. 당시 소산선생이 남긴 별도의 시첩을 발견할 수 없으나 1865년에 강항(姜沆)이라는 사람이 남긴 강수은집(姜睡隱集)이라는 시첩(책)을 발견했는데 그 속에 소산 선생의 시도 있고 송담 백수회 선생의 시도 들어 있고 학산 권삼섭 선생의 시도 있었다. 아마도 왜에 억류되어 있을 때 함께 있던 학자들이 서로 시구를 주고받은 것 같다.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다


소산 선생은 왜구에서 9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가 1600년(선조33)에 양국수교에 의하여 귀국하였다. 조정에서는 선생의 책임을 다한 행동과 그 충절을 인정하여 1603년에 후능참봉(厚陵參奉)이라는 낮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고향에서 오직 학문에 열중하다가 생을 마쳤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200여년이 지났지만 1832년(순조32) 조선 후기에 와서 뜻있는 선비들이 조정에 글을 올려 “위급한 때를 당하여 성현의 위패를 보호하는데 대의를 다하고 포로가 되어가서도 끝까지 절의를 굽히지 아니하였으니 이러한 높은 절개를 지키는 행동은 임금의 은덕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상신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내용을 인정하여 그 해 호조좌랑을 추증(돌아가신 후에 주는 벼슬, 편집자 주)하였다. 이와 같이 추증교지가 내려짐에 따라 군내 유림들의 뜻을 모아 소산사를 건립해 소산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선생의 충의 정신을 높이 받들게 되었다.


의병 창의하여 왜군과 싸운 정호의


정호의는 정호인 선생의 동생으로 호는 노산(魯山)이다. 노산 선생은 1558년(명종13) 상북면 소토리 소노마을에서 태어나서 1641년(인조19) 73세에 타계하였다. 195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적으로부터 동래성이 함락당하고 양산, 언양을 거쳐 4월 21일 경주성이 점령되었다. 그들의 주력부대는 서울을 향하였고 경주에 주둔한 왜적은 온갖 약탈을 자행하였다.

노산 선생은 양산의 이몽만, 안근, 최기 등과 의기분천 창의하여 관군과 함께 왜적과 싸웠다. 노산 선생은 경주 문천회맹에 참여하였고 그해 7월 27일 영천복성전투, 8월 21일 경주성 탈환전투, 9월 8일 경주복성전투 등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망우단 곽재우 장군의 의병에 참전하여 그 유명한 하왕산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의사로 후세에 선무원종공신 3등훈록에 기록되었다.


문천회맹(蚊川會盟)과 정호인. 호의 형제


1592년(선조5) 6월 9일 경주 반월성 남쪽에서 읍으로 흐르는 작은 해자천인 문천가에서 비밀리에 모여든 128명의 영남지역 의병들이 경주부윤과 함께 경주읍성탈환을 위한 결사항쟁의 맹세를 짐승의 피를 나누어 마시며 서약한 역사적인 다짐결의를 문천회맹이라 한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을 기록한 것이 문천회맹록이다. 이 문천회맹록에 양산의 정호인과 정호의 형제가 기록되어 있고 이몽만, 안근, 최기 선생 등 모두 5명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산 선생과 노산 선생은 소노서원 이외에 부산 충렬사와 경주 임난공신기념비단, 그리고 대구 임난호국 영남충의단에도 배향되어 매년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소산선생 사운시
(蘇山先生  四韻詩)

海水有汝沈   愀然更正衿 
해수유여심   초연갱정금

軒軒同死志  鬱鬱未蘬沈
헌헌동사지  울울미귀심

萬里宗邦遠  十年雪窟沈
만리종방원  십년설굴심

衣冠東國士  揮淚向東臨
의관동국사  휘루향동임


멀리 고국을 바라보니 바닷물만 깊도다.
초연히 다시 옷깃을 여미노라
헌헌한 모습은 같이 죽기를 다짐하고
울울한 심정은 돌아가지 못하는 마음이로다 .
만리나 먼조국이여.
십년동안 눈굴에서 잠겼도다.
의관은 같은나라선비와
눈물을 뿌리고 동쪽을 향해와 있도다.


(자료출처 : 소산실기, 양산향교지, 양산군지, 국역 금오승람(경주시))


[양산의 뿌리를 찾아서-인물로 보는 향토사]
글 싣는 순서
1. 삼장수는 누구인가?
2. 송담서원과 백수회
3. 소노서원과 정호인ㆍ호의 형제
4. 소계사와 안 근
5.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윤현진
6. 서병희 의병부대의 항일투쟁
7. 만고충신 박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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