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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록 양산대학교 보건행정과 교수 | ||
ⓒ 양산시민신문 |
요즘은 만약 길에서 다른 사람이 강도를 만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옆집에 도둑이나 강도가 들면 자기 집 문을 꼭꼭 걸어 잠그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강도나 도둑에게 덤비는 것도 위험하고, 112에 신고를 해 주면 나중에 목격자 진술 등 여러 가지 불편하고 피곤한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나에게 닥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실제로 일어났던 다음과 같은 사건을 본다면 어떤 사람도 자기 일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의 일에 그렇게 무관심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평범한 가장이 밤늦은 퇴근길에 집 입구 골목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 체하고 바로 집으로 갔다. 그날 밤늦게 고등학생 아들이 오지 않아 온 가족이 애태우며 찾아도 소식을 알 수 없었는데 경찰서에서 아들이 뺑소니차에 치여 병원에 있는데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집 앞 골목 입구에서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다가 새벽에야 행인에게 발견되어 병원에 갔는데, 사고 후 그 골목을 지났던 많은 사람의 무관심 때문에 아들은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밤늦게 골목 입구에 웅크리고 신음하던 사람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가슴을 치며 후회하였다.
서구의 개인주의적 사고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사회는 오랜 세월 동안 전통적으로 사람과 이웃에 대한 정과 사랑에 기초한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지켜왔다. 그러나 최근 몇십 년 동안 우리가 미덕으로 여겼던 모든 것들이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공동체적 유대가 흔들리고 사회 전체의 질서가 붕괴되어 급기야 도덕적 아노미(moral anomie)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 급속한 산업화의 영향도 크지만, 미디어를 통해 노출된 사회적 고통이 연민과 무관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 데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너무도 많은 사회적 고통, 너무도 많은 희생자가 무더기로 양산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고통의 경험 구조,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치유 과정이 미디어를 통해 일상화됨으로써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중들의 정서적 반응 능력이 점차 약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전쟁, 질병, 기근 및 죽음과 같은 사회적 고통에 대한 문제들은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뉴스가치가 높은 사건들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도영역에서 다루어져 왔다. 그리고 이 같은 과도한 노출이 정서적 연민의 소모 연속으로 이어져 ‘연민 피로’가 발생하게 된다고 한다. 너무나 심각하고 많은 고통의 이미지가 일상적으로 노출됨으로써 대중들의 고통에 대한 지각태도 역시 일상화되어 무관심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전통적 유대관계가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월드컵과 같은 큰 행사에서, 또 태안 기름유출 사고 등의 자연재해와 같은 국가적 재난에서 우리 민족의 단결력과 높은 수준의 질서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 우리 민족 안에 잠재된 공동체적 연대 의식을 되살려 나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모두 우리 전통윤리의 현대적인 수용을 가능하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미움과 증오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끔은 아름다운 무관심도 있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허물이나 부끄러움을 일부러 모르는 척, 무심한 척 무관심을 보여 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것 중 무엇에 가치와 관심을 두어야 할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우리는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 동물들, 자연, 환경오염, 사회적 문제 등 이 모든 것들에 더 많은 관심을 둬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모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