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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화요살롱]삶의 애착
오피니언

[화요살롱]삶의 애착

양산시민신문 기자 403호 입력 2011/11/08 11:38 수정 2011.11.08 11:14



 
↑↑ 박지언
양산대학교 로봇기계과 교수
ⓒ 양산시민신문 
하늘이 맑고 높다.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이 펼쳐진다. 가을이다. 오늘도 해를 보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직장에 오랜 친구가 있었다. 고교 동창이라 대학 시절 학과는 달랐지만 자주 만나곤 했다. 서로 전공이 달라 같은 직장에 지원했는지도 몰랐었는데 출근 첫날 우연히 만났다. 너무나 반가웠고 서로 힘이 되어 열심히 하자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친구인지라 결혼할 때 사회도 부탁했고, 친구 또한 흔쾌히 받아 주었다. 같은 직장에서 존재 자체가 훈훈하고 힘이 되는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런데 어느 날 출근하고 점심시간 식당에서 간밤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 누구? 누구라고? 뭐? 어떻게. 그 친구다. 정신이 멍한 채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고교 모임의 총무에게서 문자가 한 통 온다. 그 친구의 장례식과 장지 등등. 기가 차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존재만으로도 항상 힘이 되었는데. 믿기지 않았다. 문자가 또 온다. 그 친구가 하늘나라로 갔단다. 문자를 본 순간 주저앉았다가 한참 만에 일어났다. 어처구니가 없다. 아직 가기에는 이른데. 아직. 부모님도. 처와 자식도. 

지난번 어떤 공식적인 일에 그 친구와 동행했다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었다. 돌아오는 동안 오랜만에 많은 대화를 나누고 어려운 현실을 잘 극복해 나가자고 서로 격려하며 다음에 술자리도 약속했었다. 그것이 그 친구와  마지막이었다니. 댓 걸음에 달려간 장례식 제단에 걸려 있는 친구의 사진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친구야, 이 세상 모든 미련 훌훌 털어버리고, 마음 편히 가기는 한 거니? 이렇게 무심히 갈 걸 알았으면 더 많이 봐둘 걸 그랬다. 고이 잠들거라 친구야.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쉬어라.

현실에 돌아와서 친구의 죽음이 계속 무겁게 자리 잡고 있지만, 그 친구로 인해 자신에게 많은 경각심과 삶의 애착을 가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 친구는 정말 나에게는 소중한 도반이었다. 얼마 동안 친구의 빈자리를 아쉬워하며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누구를 위한 존재인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계속 던졌다. 정신적인 기갈 속에 물질적인 것이 하찮고, 정신적인 갈증이 해결되지 않아 어떤 누구와의 만남도 유치하게만 느껴지고 , 진지하지 못한 만남에 대한 공허함만이 남았다.

그런데 이기적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순간 또 다른 마음 한구석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삶의 의욕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본다. 피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인간의 헛된 망상과 공허한 무기력을 느끼지만, 또 다른 곳에서 강한 삶의 본능을 채찍질하고 있다. 아픔이 크면 또 다른 곳엔 더 큰 행복을 원한다는 말이 수긍이 간다. 친구를 잃고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질문으로 치닫다가 언제가부터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삶의 행복이란?’이라고 하는 또 다른 질문과 그 해답을 찾아내려는 양면적 내면성이 고개를 내민다. 친구는 떠났지만 나는 해야 될 일이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찾아 남은 인생을 설계해 이루어 나가야 된다고 하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고 있다.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 속에 책임져야 하는 가족과 삶의 애착에서 나오는 본능이 아닌가 싶다.

어느 철학가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말했다. 예술가가 아니라면 ‘인생은 짧고 행의 공덕은 크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누군가 ‘삶은 맡은 일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완성을 위한 과정이다’라고 했다. 자기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내적 완성을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이 좋을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지만 누구나 삶에 대한 애착이 있고 죽음을 보고서는 더욱 그런 것 같다.

평소 좋아하는 글귀가 있다.
 
‘세간사 모든 애착, 하룻밤 꿈 하나로 어찌 하늘에 이르리오. 몸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지 않아 허물어지고 정신이 떠나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잠깐 머무는 곳이지만 오늘은 오직 한 번뿐이오. 다시는 오지 않으리니 이 몸이 늙고 병들어 떠나기 전에 오늘을 보람 있게 살자.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여되는 것, 느끼기에 따라 길고 짧은 차이가 있나니 즐거운 시간은 천년도 짧을 것이며 괴로운 시간은 하루도 천년 같은 것.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한 것.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사람이 어찌 행복하다 하리오. 인생은 두 번 다시 오지 아니하며, 세월은 그대를 기다려 주지 아니한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정당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여 그 노력과 배려가 부끄럽지 않아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삶이 되자’

또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 속에 성경 한 구절을 생각해 본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살아가는 동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어제를 약속하고 최선을 다했던 그 친구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그 친구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열심을 다한 것이다. 짧지만 훌륭한 인생을 살다가 그렇게 간 것이다. 자기 일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였기에 그 친구는 훌륭한 삶을 살았다. 그런 친구의 빈자리의 채워나가기 위해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가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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