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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계사 전경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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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 ||
ⓒ 양산시민신문 |
처음에는 안우(安佑), 안주(安宙), 안택(安宅) 삼형제를 주향으로 하였고 안우의 손자 안근(安瑾), 안근의 아들 안시명(安 命)과 안이명(安以命), 안근의 사촌동생 안수(安琇)와 안수의 아들 안신명(安信命)을 배향하였다. 이 분들을 세상사람들이 이르기를 삼현오충(三賢五忠)이라 하였다.
1878년(고종15)에 양산군수로 있던 이능화는 양산 삼현오충가를 지어 이들의 공적을 높이 찬양했다. 삼현이라 일컫는 안우, 안주, 안택 삼형제는 모두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청백하게 살아 높은 칭송을 받았고, 오충의 다섯 분의 가족들은 모두 임란공신으로 큰 공을 세운 분들이기 때문이다. 1945년 설단을 만들 때 광주 안씨 판사공파 파조 안우 형제의 할아버지인 안몽득(安夢得)을 같이 모셔 사현오충(四賢五忠)이 되었다.
사현오충 모신 소계사
소계사는 상북면 소토리 소노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1783년(정조7)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화재 등으로 소실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중건을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않다가 1866년(고종3)에 사림과 문중의 뜻을 모아 소계사를 복원하여 삼현오충 즉 8분을 모시고 향사하였으나 1868년(고종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그 곳에 만성재라는 서당을 세워 강학소로 운영하면서 많은 인재를 육성하였는데 상해임시정부요원이었던 윤현진 국사도 어릴때 이곳에서 한문을 익혔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5년 유림들의 발의로 사현오충을 봉향할 소계단(蘇溪壇)을 만들어 제향하여 오다가 1989년 문중의 힘으로 지금의 소계사를 건립하게 되었다. 건물은 본건물인 소계사우와 신문(神門)인 현충문, 관교당, 유도문(由道門)으로 되어있다.
대원군척화비 옮겨놓다
소계사 유도문 밖에 대원군척화비가 세워져 있다. 소계사 중건 당시 다른 곳에 방치되고 있었던 것을 문중어른이 이곳이 안전한 곳이라고 옮겨놓은 것 같다. 추정컨대 양산시 중부동 지금의 경남은행 사거리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그때 그곳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도지정문화재 120호로 등록되어 있다. 척화비(斥和碑)는 조선 말기 1866년(고종3)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8)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서양제국주의 열강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조선정부의 결정을 바탕으로 전국 각 고을마다 건립하였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그리 많지않다.
그 내용을 풀이하면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우리의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1866)에 짓고 신미년(1871)에 세우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戒我萬年子孫孫, 丙寅作, 辛未立)’라고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자식들과 창의하다
안근 선생의 본은 광주(廣州)이고 호는 구암(龜庵)이다. 선생의 할아버지인 안우(安佑)가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여 1524년(중종19)에 진사에 합격하여 밀양, 선산 등지의 부사를 역임하고 재임 중에는 청빈하여 청백리로 칭송받았다. 이후 양산 상북면 소토리로 이주하였다. 안근은 상북면 소토리에서 태어나 학문을 닦으며 야인으로 생활하던 중 1592년(선조25)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인 시명과 이명을 데리고 군량과 병기를 모아 창의를 일으켜 수백명의 의병과 함께 양산고을 수호에 나섰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이수생, 이몽란, 최기, 방익, 윤옥, 윤발, 정호인, 정호의 등도 일어섰다. 낙동강 포구로 몰려오는 왜적을 감동진과 금정산에서 방어하여 왜적 수십명을 베었고, 동래 출신 김정서와 함께 동래전투에서 싸워 대승을 올렸으나 함께 싸우던 사촌동생 안수(安琇)는 이곳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안근의 삼남 안이명은 청도 운문산에서 청도 의사 박경전과 합세하여 청도산중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고 이남 안시명은 울산 구강으로 가서 분전 끝에 큰 전과를 올렸다.
경주 문천회맹에 참여하다
그해 6월 9일 경주 문천가에서 부윤 판관을 비롯한 각 읍으로부터 많은 의사들이 가담하여 회합동맹하니 이가 곧 문천회맹이었는데 양산에서의 참가자는 안근, 안신명, 정호인, 정호의, 최기등 5명이었다. 이 회합에서 편대를 조직하여 금오산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 10월에 안시명은 경주 문천과 구강전투에서 안시명은 형산전투에서, 안이명은 밀양, 청도, 동래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6년 7월 1일 안근은 팔공산으로 가서 명장 양호를 위시한 영남의사들과 회동하였는데 이때 양산사람으로는 안근, 안시명, 안이명, 이수생, 이몽란 등이었다.
정유재란 때 하왕산전투 참가
1597년 일본이 재침략해오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안근은 아들을 데리고 하왕성에을 가서 곽재우와 같이 성을 정비하고 자신은 의병부대 부장으로 활약하면서 하왕산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다. 안이명은 당포 충무공 이순신장군 휘하로 들어가 내륙 못지않게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왜적에게 포로가 된 송언봉 등을 구출하고 담포첨사와 좌도수군 우후(虞侯)로 봉직하였다. 이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8년 동안이나 한 가족 모두 전장을 누비며 왜적을 물리친 충신들이었다. 세상사람들을 이를 두고 안씨 일문 5충이라고 하였다. 임란이 끝나고 안근과 둘째아들 시명은 선무원종 공신3등에 서훈되고 셋째 이명은 선무원종 공신 1등에 서훈되었다.
자료출처 양산역사문화관광선집(2001, 양산문화원)
양산의 금석문(2004, 양산문화원)
양산시지(2004, 양산시지편찬위원회)
향토연구 제3집(2009, 양산향토사연구회)
글 싣는 순서
1. 삼장수는 누구인가?
2. 송담서원과 백수회
3. 소노서원과 정호인ㆍ호의 형제
4. 소계사와 안근
5.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윤현진
6. 서병희 의병부대의 항일투쟁
7. 만고충신 박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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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계사 유도문 밖에 있는 대원군 척화비(경남도 지정문화재 12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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