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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많은 산 친구들과 힘든 등반을 통해 동지애를 느꼈고 고통과 기쁨을 공유할 수 있어 힘들어도 이보다 더 좋은 인생경험은 없었다. 갑작스런 만남과 이별로 얽힌 수수께끼 같은 인생이라지만 인생은 어차피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의 지붕이라 부르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고 싶어 한다. 또 정상에 서면 어떤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어 한다. 죽기 전에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꿈의 에베레스트를 담아본다. 나는 에베레스트를 꿈꾸면서 정상등정이란 목표를 가지고 원정을 떠났지만 막상 거대한 산 앞에 서면 살아서 돌아가야지 하는 나약함으로 바뀌었다. 신의 영역이라고 듣던 그 곳에서 신이 허락해야만 오를 수 있는 곳이라고 믿었다.
고소에서 초상화 모델이 되다
1996년 일본산악인 노구치 겐과 초오유(8천201m)등반에서 만난 인연으로 2001년 초모랑마(에베레스트)등반을 함께하게 되었다.
해발 5천m.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 베이스캠프 주변은 온 천지가 하얀색이다. 초모랑마 베이스캠프의 날씨는 화창하지만 등반은 불가능한 상태이다. 바람이 늘 서풍으로 강하게 불어오다가 오늘 아침에는 동풍이다. 기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지만 바람의 방향이 서풍에서 동풍으로 바뀌었다. 다소 쌀쌀한 편이지만 견딜만한 날씨다.
그동안 ABC(6천400m)나 노스콜(7천m)에 있을 때는 사실 너무 고독했다. 베이스캠프에 내려와 하룻밤을 자고 나니 마치 저승에 갔다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다. 오후엔 일본 여성 산악인인 모모코가 나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텐트 안에 자리잡고 앉아 있는 나를 2절지 크기의 도화지에 스케치를 한다. 캔버스 위에는 형형색색의 물감은 없지만 굵은 연필심으로 그려내고 있다. 화실이 아닌 해발 5천m에서 초상화의 대상이 된 기분이 새롭다.
히말라야 등반팀에는 진두지휘하는 등반대장(연출)이 있으며, 대원(배우)들이 혼연일체로 이루어져 있다. 산이라는 무대와 날씨라는 장치·조명이 주요 요소로 등장한다. 여기에 회화가 곁들여 있으니, 등반도 하나의 종합예술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히말라야는 신의 영역
요즘처럼 ‘무사귀환’이라는 말이 소중할 때가 있었던가 싶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교통사고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대한민국이지 않는가. 아니 아침인사를 하고 출근한 사람이 사고로 인해 안타까운 일을 당하였다는 뉴스는 이젠 주요 기사가 아니라 단신 기사로 처리되고 있는 세태이다.
마찬가지로 히말라야에 오르겠다고, 정복하겠다고 도전장을 내미는 산 사나이 치곤 어느 누가 무사귀환을 바라지 않겠는가. 얼마 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악인 박영석 씨의 비보는 진정한 산 친구를 잃은 허망함으로 다가온다.
흔히들 히말라야는 ‘신이 허락한 자만 오를 수 있다’는 뜻에서 성역과도 같은 신의 영역이라 부른다, 사람보다 신(神)이 많다고 전한다.
‘반드시 죽는다’는 점괘 받다
2000년 대한산악연맹이 문화관광부 후원을 받아 한국최초 세계7대륙 최고봉 원정대(대장 손중호)를 구성했다. 에베레스트 원정을 가기 직전, 홀로 계신 모친이 나를 찾아와 또 어디를 갈려고 그러느냐 눈치를 채고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모친은 큰 아들인 내가 험한 산악지대를 오르는 먼 길을 돌아다니는 것을 못내 걱정스러워 해외 출발전에 철학관을 찾아 점괘를 봤다. 노모가 차마 말은 못하고 부산에 있는 철학관 위치를 가르쳐주며 원장을 한번 만나보라고 하신다. 나의 사주관상을 면밀히 관찰한 뒤 원장이라는 분이 내게 내보인 것은 ‘필사(必死)’라고 적힌 A4 용지 크기의 인생사주에 관한 글귀였다.
모친은 그래서 아들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나 보다. 아니 이대로 보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반드시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정작 이러한 내용을 접한 나로서는 무척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죽음… 죽는다… 죽는다… 필사(必死)… 반드시 죽는다…’
3월, 막상 ‘죽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에베레스트 원정을 준비하는 게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물론, 원정기간 내내 잊어버리고 싶은데 죽음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태국을 거쳐 네팔 수도 카트만두 트리부반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현지에서 머무는 동안 부족한 식량과 장비 등을 구입한 뒤 네팔 관광성 브리핑 등 행정절차를 모두 마치고 정부연락관을 배정받았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원정대는 나를 포함하여 전국에서 8천m 원정 경험이 있는 7명의 대원들로 구성됐다. 베이스캠프로 가기 위해 쿰부 히말라야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팡보체 곰파에 들렀다. 이 사찰에는 히말라야가 신앙이 되어 곰파를 지키고 있는 라마승이 계셨다. 라마승은 정성을 다하여 나에게 부적을 만들어 주었다. 한 번 가면 다시 못 온다는 생각에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라마승이 만들어 준 부적
부적을 빨간 끈으로 고리를 만들어 몸속에 품고 죽음이라는 그림자와 함께 팡보체에서 5천300m 지점에 있는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 현지 셰르파들이 베이스캠프 주변에 돌을 주워다 행운의 숫자인 7을 상징한 듯 7층석탑으로 만든 라마제단을 공들여 쌓았다. 이런 요식에 세계 각처에서 몰려든 등반대는 종교 구분 없이 다 거쳐가야 한다. 그래야만 세르파들이 생사를 같이하는 등반을 하게 된다. 나를 비롯한 원정대원들은 모두 성스러운 돌탑 앞에서 무사등정과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기원제를 지냈다.
나는 내 온 몸과 마음을 나의 의지에서 떼어 내어 신에게 의탁하였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솔직한 기원이었다. ‘이 한 생명 히말라야의 여신에게 내맡깁니다’라고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나지막히 어머니를 불러 보면서 순간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등반장비로 완전무장을 한 대원들은 긴장된 마음으로 라마제단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고는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아이스폴로 향했다. ‘얼음궁전’ 또는 ‘얼음기둥지대’라는 아이스폴을 통과하는 것은 상당히 위태롭다. 이 곳은 마치 고층건물을 부셔 놓은 것 같은 세락과 입을 쫙 벌리고 있는 크레바스 지역에 산악용 알루미늄 사다리를 설치해 통과하는 등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발을 헛디뎌 크레바스에 빠지게 된다면 그 곳에서 영영 헤어 나오기 어렵다.
고소 등반 일주일째 되던 날, 아이스폴 상단 오른쪽 눕체봉에서 굉음과 함께 대형 눈사태가 일어났다. 전진 베이스캠프에 있던 나는 우리 팀. 셰르파가 등반하던 중이라 큰일 났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친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등반로까지는 눈사태가 미치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게다가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우리를 점점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한낮에는 태양의 복사열 때문에 섭씨 39도까지 올라가고, 밤이면 혹한의 날씨로 변하였다. 아마도 ‘신의 분노’가 이것이지 않을까.
“더이상 오를 곳이 없다”
원정대는 죽음의 지대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7천300m까지 올라간 캠프3에서 고소 적응 등반을 마치고 다시 전진 베이스캠프(ABC)로 되돌아 왔다.
전진 베이스캠프에서 기상이 호전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등반의 모든 것을 손중호 대장으로부터 이임받은 이인 등반대장은 1차, 2차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3차 공격까지 실패를 거듭하자 가슴이 무너지는 한없는 책임감을 느낀다. 극도로 피로하고 말문이 막힌 상태로 지내다가 몸과 마음을 추슬러 공격조와 지원조를 재편성했다. 4차 공격조는 박헌주와 모상현대원이다. 이들은 다시 등반을 시작한 끝에, 고도 8천m 사우스콜에 다다를 무렵 남봉에서 하산하고 있는 대원들과 제네바스퍼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형 내려가시죠” 한다. 자기들 판단엔 내가 올라가는 것이 무리라고 보였던 것이다.
정상 공격을 위해 마지막 캠프인 사우스콜을 출발한 대원들은 악전고투 끝에 5월 16일 정상에 섰다. 정상에선 모상현대원은 “대장님 큰일났습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습니다”라고 베이스캠프와 눈물섞인 교신을 했고 전 대원의 축하 함성이 최고봉을 향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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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스캠프에서 노구치 겐(오른쪽)과 포즈를 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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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레스트 등정 루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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