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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산골 농부의 세상사는 이야기]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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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농부의 세상사는 이야기]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양산시민신문 기자 409호 입력 2011/12/20 10:17 수정 2011.12.20 09:47



 
↑↑ 서정홍
농부시인
본지 객원칼럼니스트
 
형,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며칠 전에 저를 다시 찾아와서 농사지으며 살기로 마음먹었다며, 고쳐서 살 수 있는 빈집이나 집 지을 땅을 알아봐 달라고 하셨지요. 가끔 저를 찾아오는 분들 가운데 형과 비슷한 부탁을 하고 가는 분이 있답니다. 참 살맛나게 하는 ‘부탁’이지요. 모두 도시로, 도시로 떠나 버린 쓸쓸한 산골 마을에서 마음 나눌 동무 하나 없이 사는 저는, 그 말만 들어도 저절로 신바람이 납니다.

제가 살고 있는 나무실 마을은 열 집밖에 안 되는 작은 산골 마을이지요. 농사철이 아니면 하루 내내 바람 소리와 새소리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맨 아랫집에서 우는 닭 울음소리를 맨 윗집에서 들을 수 있는 작은 마을이 사람 살기에는 가장 좋다고 하더군요. 사람 살기에 좋다는 말은 함께 사는 이웃들이 남이 아니라 부모 형제 같다는 말이고,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을 만큼 서로를 잘 안다는 말이겠지요.

오늘 아침에도 스피커에서 찌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마을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알립니더. 오늘 아침 일곱 시까지 우동댁으로 오이소. 아침밥 드시지 말고,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오이소”

마을 사람 누구도 ‘왜 아침밥 드시지 말고 오라’고 하는지 물어보지 않습니다. 어젯밤에 우동 아지매 시아버님 제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누구네 집에 제사가 언제 있는지 다 알고 있을 만큼 작은 마을이니까요. 아침에 제삿밥 나누어 먹었는데, 제사 나물이 남으면 점심 무렵에 또 방송을 합니다.

“아아, 알립니더. 오늘 열두 시까지 점심밥 드시지 말고 모두 우동댁으로 모여 주이소.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오이소. 제사 나물이 남았으니 같이 비벼 뭅시다”  

그런데 밥을 나눠 먹을 때나 막걸리를 나눠 마실 때나, 마을 사람들은 기쁜 이야기보다는 슬프고 한숨 섞인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습니다. 그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알 수 있답니다.

이웃 마을에 사는 누구네 막내아들이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았다는 둥, 누구네 아들이 암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한다는 둥, 누구네 손자가 공부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아파트에서 뛰어 내렸다는 둥, 누구네는 농가 빚에 시달려 논밭 다 팔아 치우고 도시로 떠났다는 둥, 누구네 할아버지가 밥맛이 없어 병원에 갔더니 간암 말기라 두세 달밖에 못 산다고 했다는 둥, 누구네 아버지가 경운기 사고로 팔다리가 다 부러져 구급차에 실려 갔다는 둥, 이런저런 이웃 마을 소식까지 다 들을 수 있답니다. 참말이지 기쁜 소식은 거의 없고 슬픈 소식뿐입니다. 그 슬픔을 잊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땀 흘려 일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일하다 보면 어지간한 슬픔 따위는 잊고 사는 것이지요.

형, 도시에 살면서 농촌이란 말을 떠올리면 어떤 게 먼저 떠오릅니까? 늙고 병든 할머니와 할아버지, 빈집, 빈집에 들락거리는 들고양이, 독한 농약과 화학비료, 비가 오면 농약과 함께 흐르는 개울물, 개울물 속에 죽은 물고기들, 개울마다 도시 사람들이 함부로 버리고 간 쓰레기, 여기저기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는 농약병과 비닐 따위, 좁고 지저분한 방, 농가 빚, 땡볕, 고된 노동, 무식함, 업신여김, 주름살, 신경통, 시끄러운 경운기 소리, 외양간 똥냄새, 똥거름, 똥파리, 모기, 파리, 가난, 불편함, 외로움 따위가 먼저 떠오르겠지요.

농촌이란 말을 떠올리면 자연, 고향, 어머니, 그리움, 순수함, 인정, 장독, 된장, 간장, 사람 냄새, 흙냄새, 풀냄새, 꽃냄새, 나무, 들꽃,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분꽃, 작은 개울, 미꾸라지, 메뚜기, 개똥벌레, 제비, 새소리, 바람 소리, 맑은 하늘, 밤하늘에 빛나는 별, 돌담에 소복이 쌓인 하얀 눈, 따끈따끈한 구들방, 장작, 지게, 군고구마, 옛이야기, 썰매 타기, 깡통 차기, 연날리기가 떠올라야 하는데 말입니다.

농촌이라 하면 부정적인 생각부터 드는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농사지으며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형을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농촌으로 먼저 들어와 살고 있는 선배로서 ‘희망의 텃밭’을 한 평조차 일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형이 농사지으러 들어오면 함께 ‘희망의 텃밭’을 일구어 가고 싶습니다. 형, 한해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형과 함께 들녘에서 땀 흘리며 일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봄이 기다려집니다. 그날을 애타게 기다리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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