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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양산의 뿌리를 찾아서]인물로 보는 향토사 ⑤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윤현진

양산시민신문 기자 409호 입력 2011/12/20 11:06 수정 2011.12.20 10:36
30세 청년으로 죽기까지 애국애족으로 일관한 의사(義士)



↑↑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

1번 윤현진, 2번 안창호, 3번 신익희, 4번 현 순, 5번 김 철, 6번 최창식, 7번 이춘숙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윤현진 선생은 1892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158번지 내전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호는 우산(右山)이다.

그의 아버지(윤필은)는 동래부윤을 지냈고 그의 할아버지(윤홍석)도 동래부사와 사천군수를 지낸 구한말 관료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릴때 성품이 후덕하고 총명하였으며 향리에 있는 만성재에서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만성재는 지금의 소토에 있는 광주 안씨 문중사당인 소계사가 1868년 대원군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난 이후 이곳에 안평중(安平重)이라는 분이 만성재라는 간판을 달고 은거하면서 한학을 가르친 곳이다.

만주, 일본 등지 돌며 애국청년 활동


선생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한 뒤 1911년 국내외 정세와 망명자들의 동향을 살피기 위하여 중국, 만주, 상해, 북경,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등을 돌아보면서 여러 인물들과 접하며 견문을 넓혔다. 특히 만주 간도에서 이시영(李始榮)을 만나 돈독한 우의를 다졌고 북경에서 청나라의 내분을 보면서 새 시대에 적응하려면 그 시대에 맞는 식견과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1912년 일본명치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조선유학생 학우회와 조선 광복 동맹결사단을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했으며 1916년에는 김철수ㆍ정노식ㆍ장덕수 및 중국인들과 같이 신동아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대동청년단에 가입하면서 많은 동지들과 같이 활동하였다.


의춘의숙 설립해 민족사상 고취


선생은 학교 졸업 후 일제가 갖은 수단에 진력과 방법으로 매수하려고 하였지만 냉철하게 거절하고 귀국하여 1917년 고향인 양산에 의춘의숙(宜春義塾)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키고 항일독립정신을 배양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의춘은 양산의 옛 지명이다. 또한 일본인의 상권에 대항하기 위하여 소비조합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는데 조합은 일용잡화, 상품을 염가로 공급하여 날로 번창했으며 일본상인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들은 양산헌병분견소 소장을 통해 그에게 압력을 가하고 소비조합은 폐쇄위기에 처하였다.

선생은 1919년 초에 의춘양행(宜春洋行)을 설립하여 일본상품을 배척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근대적 회사로 운영하다가 동지 최학선에게 위탁 경영하게 하고 상해로 망명하였다. 최근 의춘양행의 설립자가 지영진이란 주장도 있고 윤현진의 형인 윤현태라는 주장이 있으나 확인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윤현택, 지영진 등과 함께 주식을 공동으로 투자한 것 같으나 주주명부를 파악하지 못하였다. 지영진의 조카딸인 지정수 씨의 증언에 따르면 의춘양행은 지영진이 설립하였고 하나의 무역상으로써 소비조합이 아니고 상해임시정부로 독립자금을 보내는 비밀루트역할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의춘양행에 대해서 좀 더 연구할 과제가 남아있는 것 같다. 선생의 형인 윤현태가 부산에 있는 백산상회의 대주주로서 참여하고 있으면서 안희제 선생과 함께 독립자금을 조달하고 있었으므로 윤현진선생도 여기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1919년 3월 26일 최학선, 지영진과 함께 식사하면서 의춘양행을 부탁하고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다. 지정수님의 증언에 의하면 윤현진 선생이 출국할 때 지영진이가 15만원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쌀 1가마니에 3원정도 했다고 하니 대단히 큰 돈 이었다. 선생이 망명한데는 3.1운동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재정 도맡아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안창호, 이동휘, 김구, 김규식, 여운형, 신익희, 이동녕등과 함께 임시정부 핵심인물로 참가하게 된다. 임시의정원 제2회(1919년 4월 22일 ~ 4월 23일)의원으로 피선되어 초대 재무차장에 피임되어 임시정부의 살림살이에 동분서주하였다. 부족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미국선교사를 통하여 고향의 사재와 백산상회 자금 30만원을 임정에 헌납하면서 어려운 임시정부재정문제를 해결하는데 적극 노력하였다.

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와 함께 자금모집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에 진력하였고 1921년 5월 말에는 국민대표회의의 기성회를 조직하여 임정의 내분갈등을 중도적 입장에서 수습하였으며, 같은 해 중한국민회조사를 결성하여 한ㆍ중은 예부터 혈맹관계이므로 함께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선생은 김구, 김순애, 김철, 손정도등과 함께 상해에서 의용단을 조직하여 국내조직과 연계하여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의 탁월한 식견(識見)과 뛰어난 지모(智謨)는 임시정부의 외교, 법무, 기획, 운영 등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건국훈장 추서, 국립묘지 안장
 

선생께서는 구국의 일념에 건강을 돌보지 않고 동분서주하다가 병을 얻어 광복의 한을 풀지 못한 채 1921년 9월 17일(음 8월 16일) 이역만리 상해에서 순국하였다. 향년 30세로 너무나 아까운 나이였다. 선생의 비보를 접한 국내외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그의 서거를 애통해 했다.

일제의 <조일신문>에서도 ‘형극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폐망이라고까지 논평하면서 대서특필하였다. 그만큼 일본에서도 무서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선생의 장례는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치러졌고 임시정부의 안창호, 김구, 여운형 등이 참석하여 애도하였다. 유해는 상해 정안사 외인묘지에 안장됐다.

선생의 형인 윤현태는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상해 정안사에 있는 윤현진 묘소를 찾아 그곳에 ‘윤현진 묻음’이란 비석을 세웠다. 선생은 “독립하지 않으면 나의 유골은 고국산천에 묻지 말라”, “독립하지 않으면 나의 자녀를 혼가시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1960년 6월 2일 양산의 애향단체인 춘추계에서 중심이 되어 춘추공원에 양산군민 일동의 이름으로 추모비를 세웠고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65년 6월 23일 정부는 선생의 유해를 봉환하여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출처   
양산항일독립사 2009/양산향토사연구소
부산독립운동사 1996/부산지방보훈처
양산디지털문화대전


↑↑ 1921년 윤현진 선생 장례행사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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