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기획/특집

이상배가 안내하는 세계 6대륙 최고봉⑤
죽음과 맞선 뒤 다시 찾은 초모랑마

양산시민신문 기자 410호 입력 2011/12/27 13:06 수정 2011.12.27 12:33






 
↑↑ 이상배
·양산대학 생활체육과 졸업
·히말라야 에베레스트(8천848m), 초오유(8천201m), 가셔브롬2봉(8천35m), 로체(8천516m) 등정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천895m), 북미 맥킨리(6천194m), 남미 아콩카구아(6천959m), 유럽 엘부르즈(5천643m) 등 5개 대륙 최고봉 등정
·(사)대한산악연맹 경남연맹 부회장
·체육훈장 기린장 수상
 
2006년 꿈의 에베레스트원정대가 만들어졌다. 순조롭게 등반이 진행되는 가운데 마지막 캠프인 사우스콜(8천m)까지 진출했다. 캄캄한 밤중에 공기가 희박한 곳에서 산소통에 의지한 채 올라가고 있지만 발코니를 지나자 등반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이미 7천300m 지점에서 하루종일 힘들게 올라온 터라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에베레스트 남봉 8천760m 지점에 다다랐다. 정상이 눈앞이다. 남봉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 정상은 불과 몇 분이면 오를 것만 같았다. 아니, 에베레스트가 나를 오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힐러리스텝은 그리 어렵지 않고 단숨에 타고 올라갈 것 같다. 호흡을 크게 한 뒤 힐러리스텝으로 접근하는데 갑자기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정상 바로 앞에서 추락하다


정상이 바로 눈 앞에서 빨리 오라고 손짓하건만 몸은 한 발자국도 옮길 수가 없다. 정상에 먼저 올려보낸 대원은 셀파 텐지와 함께 힐러리스텝을 내려오고 있다. 정상에 올랐던 텐지가 다가와서 내 배낭을 열어 산소를 확인하더니 “미스터 리 옥시즌 차이나”라고 외쳤다. 산소가 없다는 말이다. 기상이 점점 나빠지면서 텐지가 빨리 하산할 것을 종용했다. 고소에서 판단이 흐려졌다. 짧은 순간이지만 만감이 교차한다.

기상 악화와 산소 부족으로 인해 안자일렌으로 고통스럽게 하산하던 텐지가 줄을 풀고 도망치듯이 내려갔다. 일순간 히말라야의 세찬 강풍과 혹독한 추위 속에 홀로 남겨졌다. 잠도 설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황에서 육신은 에너지 고갈상태에 빠졌다. 어둠 속에 잡고 내려가던 생명줄인 고정로프가 얼어붙어 있는 바람에 잡고 있던 손이 로프를 그냥 놔 버렸다. 그 순간 내 몸은 얼음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저승 문턱에서 만난 어머니


‘저승이 가까워졌구나’ 드디어 여기서 죽는구나 하는 순간에 또 미끄러졌다. ‘잠시 후에는 온 몸이 박살나면서 절벽 어느 곳으로 떨어지겠지’ 순간 생각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였다. 저승문에 들어서면서 ‘어머니 불효자인 아들 먼저 갑니다’라고 마지막 하직인사를 올리며 펑펑 울었다. 얼음절벽에 부딪히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락으로 정신없이 떨어지다가 저승 문턱 앞에서 멈추었다. 정신을 차려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이미 정신상태도 흐트러진 상태여서 어디가 어디인지 도저히 분간을 할 수가 없다. 해발 8천m, 영하 40℃의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몸의 반쪽은 냉동이 된 상태에서 히말라야를 온 몸으로 끌어 안고서 한없이 울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나의 꿈과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한꺼번에 나의 감성을 몰아쳤다. 참으로 절박했다. 그리고 차츰차츰 빙설에서 얼어가는 육신이 감각조차 무뎌지는 등 마비증상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내가 과연 몇 분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처절함이 가슴에 대못을 박듯이 파고 들어왔다. 지금 이 캄캄한 순간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다. 피부를 세차게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만이 나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실종 타전 뒤 구조된 행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서,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절박함 속에서, 정상을 밟지 못한 채 쓰러질 수 없다는 처절함 속에서, 다시 아들과 만나야만 한다는 약속과 이대로 어머니를 홀로 남겨둘 수 없다는 다짐속에서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짐승처럼 기어다니고, 구르면서 사우스콜의 텐트 불빛을 찾아 나는 살아서 가야 한다며 사투를 벌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고도 8천m 지점에서 사우스콜 대원들에 의해 발견된 나는 막사 텐트안에서 눈을 떴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나를 따뜻하게 감쌌다. 바로 옆에 누워있는 대원도 사우스콜 부근에서 사경을 헤매다 겨우 구조됐다고 한다. 동상의 상처가 대단히 커 보인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한국원정대원들은 내가 실종된 것으로 판단하고 국내에 실종소식을 타전했다고 했다. 히말라야에서 실종은 사실상 죽음이나 다름없는 것이어서 나의 귀환은 정말 천운이 아닐 수 없다.


원정 실패에 따른 후유증


돌아보면 등산은 내게 익숙한 것들과 이별하고 새로운 것들과 만나 사귀는 법을 경험하게 해준 것 같다. 다혈질이고 모난 곳 투성이던 나를 의지할 곳 없는 공간 속으로 내동댕이쳐 그 곳에서 만나는 것들과 몸과 마음을 섞으며 더불어가는 그런 인생경험을 쌓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금 넓어지고 용감해진 나를 ‘긍정하는 법’을 산이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떠난 자리로 돌아올 무렵이면 곁에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6년 만에 다시 꿈의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만들었지만 많은 상처를 남기고 돌아왔다. 원정대로선 정상에 섰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실패한 원정이었다. 많은 것을 잃었다. 죽음의 순간을 넘나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나서 한동안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우울증으로 인해 사람을 기피하는가 하면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졌다.


혼자 떠난 세 번째 도전


1년 뒤 에베레스트 세 번째 원정은 나 혼자 떠났다. 어쩌면 히말라야원정 자체가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혼자 떠났다. 남다른 각오와 집념으로 티벳루트 초모랑마 원정을 가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인천~네팔간 대한항공 측에서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비즈니스석을 마련해 주었다. 고맙지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 있어 8천m 원정은 이젠 마지막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은 허영심이 아니라 나의 마음 속 깊은 본능에 의한 것이다. 일본 산악인 노구치 캔과 합동으로 초모랑마 베이스캠프에서 만났다. 2001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 했건만 다시 오게 되었다. 전진베이스캠프가 만들어지고 순조롭게 등반이 진행 되는가 싶더니 쿡인 마일라가 심한 감기몸살로 문제가 발생했다. 하는 수 없이 카트만두로 내려보내고 고용된 셀파와 노스콜쪽으로 올라가 힘든 등반을 계속해 나갔다.


드디어 올랐다. 그 정상에


에밀자벨은 그의 저서 <어느 등산가의 회상>에서 “어떤 깊고 저항하기 어려운 본능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높이면서 오르고 또 오르고 끊임없이 오르기를 원하고 항상 최고의 봉우리를 남몰래 사랑한다”고 했다. 그렇다. 나 자신도 최고봉을 오르고 싶어 세 번째 도전장을 낸 것이다.

2007년 5월 17일 저녁 9시 캠프4를 출발해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로프를 타고 곡예하듯 넘어갔다. 졸음과 추위에 시달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동행한 셀파 앙 밍마는 쉬지말고 계속 걸을 것을 재촉한다. 밤새도록 매달리기도 하고 걸었다.

세상이 밝아 오면서 차츰 정상이 가까워진다는 기쁨 속에 걸음을 계속해 나갔다. 아침 8시 50분 드디어 세계 최고봉에 올랐다. 너무나 큰 성취감에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신은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등산가는 “우리는 왜 산에 오르는가?”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언제나 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1950년 인간으로서 처음 고도 8천미터 안나푸르나에 오른 프랑스 원정대장 모리스 에르조그는 그의 원정기를 아래와 같이 맺었다.

“안나푸르나는 우리가 빈 손으로 갔지만 앞날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시 없는 보물이다. 안나푸르나를 오르고 우리 인생의 새 장이 열렸다.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있다”


↑↑ 베이스캠프에 늘어선 텐트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