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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양산의 뿌리를 찾아서]인물로 보는 향토사 ⑥
서병희 의병부대의 항일투쟁

양산시민신문 기자 412호 입력 2012/01/10 10:09 수정 2012.01.10 09:29
한의사에서 신출귀몰한 의병장으로 활약




↑↑ 달성 서씨 문중에서 상북면 좌삼리 향리에 세운 재실.


글 싣는 순서


1. 삼장수는 누구인가?
2. 송담서원과 백수회
3. 소노서원과 정호인ㆍ호의 형제
4. 소계사와 안근
5.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윤현진
6. 서병희 의병부대의 항일투쟁
7. 만고충신 박제상


서병희(徐炳熙)는 1867년 양산시 상북면 좌삼리 97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13세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20세 되는 해부터 서울에서 4년간 한의학을 배우고 돌아와 35세인 1902년부터 향리에서 한의업을 경영하였다. 부인 안모열 씨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어 3종질인 서정근(徐定根)이 대를 이어가고 있다.


일제강점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였을 때 전국 각지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의병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양산에서는 서병희 선생이 분연히 일어섰다.

1907년 2월 11일 향리에서 운영하던 한의업을 접고 서울로 올라가 왕산 허위(許爲)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군사훈련과 의병활동을 함께하였고, 그해 겨울 경기도 양주지역에서 전국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었을 때 총대장 이인영 휘하에 허위가 군사장(軍師長)으로 발탁되었다.

1908년 1월 창의군이 서울 진공작전을 개시할 때 서병희는 허위의 의병 300명과 함께 선봉에 나가 싸웠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서울탈환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난 후 허위 대장으로부터 서병희는 경상도에 가서 거사하라는 밀명을 받았고, 허위의 부하 51명을 인솔하여 경북 경주군 산내면에 있는 아미산에 들어가 이곳에서 창의한 윤치의(尹致儀)와 합제하여 병역 68명, 화승총58정, 양총2정, 군도 1진으로 부대를 재편성하고 거사를 위한 훈련에 돌입하였다.

 
치밀한 의병부대의 조직편제


서병희의 의병부대는 유격전에 적합한 전투조직으로 편제되었다. 의병장인 장관(將官) 아래에 소모(召暮)가 있고, 그 아래에 도포(都砲)와 파수장(坡守將), 연습장(鍊習將)이 있다. 연습장의 수하에는 수종사원(首從事員)과 집사(執事)가 있었다. 실제적인 전투조직으로는 분대장격인 일초십장(一哨什長)과 이초십장(二哨什長), 그리고 삼초십장(三哨什長)이 편제되어 있고, 이들 십장 밑에는 차지(次知) 이하 행동대원 8~10명이 분속되어 있다. 이 이외에 전라도 총각(總角)4명 및 향관(餉官) 대원 3명이 배후에서 지원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부대조직원의 업무를 보면 소모는 의병을 모집하는 책임자이자 비서관이다. 도포는 부대의 무기를 구입, 보관, 관리하는 책임자고, 파수장은 부대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계책임자로 짐작된다. 연습장은 대원의 훈련, 작전 등의 계획을 수립, 시행하는 책임자이고 수종사원은 작전훈련 담당교관이며, 집사는 그 아래 훈련 보조요원으로 여겨진다. 다음으로 행동대원으로 분대장격인 일십초장, 이십초장, 삼십초장이 있고, 각초에는 차지가 있는데 이들은 부분대장인 듯하다. 

전라도 총각 4명은 각종 연락병의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보이며 향관은 부대이동 때 앞뒤에서 길을 인도하는 병관이다. 이와 같이 50여명의 소규모 부대를 편제하여 유격전에 손색이 없도록 치밀하게 편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격문 전달해 일침 가하다


서병희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는 2년간에 걸쳐 체포될 때까지 끊임없이 전투를 전개하면서 일본 수비대를 괴롭혀왔다. 1908년 2월 19일부터 1909년 10월까지 경주, 양산, 산청, 합천, 창원, 진주, 의령, 고성 등 경남 일원에서 14차례에 걸쳐 일본수비대와 교전하여 적을 사살하며 일경을 교란시켰다. 특히, 1909년 음력 4월 14일 함안군 군북시장에서 일본인 1명을 실신시키고, 격문을 지어 일제의 수비대장과 경찰서장에게 전달해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규탄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 의병활동의 정당성과 일본인들의 귀국을 촉구하였다.


체포된 후에도 의연함 잃지않아


 
 
의병장 서병희는 1909년 음력 10월 10일 함안군 칠원면 부곡리 민가에 화승총 10정, 양총 2정, 권총 1정, 도(刀) 1진, 의류 등을 숨겨놓고 상인으로 변장하여 혼자 몸으로 세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김해군 한림면 유림정으로 간 사이에 일군수비대에 의해 숨겨둔 장비는 압수되고, 부하 3명이 체포되었다. 이를 모르고 창원부 내서면 사율리로 은신하여 어물상을 계획하던 중 밀고에 의하여 10월 11일 구마산 주재소 순사에게 체포되어 의령지구 수비대장에게 인계되어 취조를 받았고 향년 43세로 순국하였다.

서병희 의병장은 체포 후 취조과정에서 대원들의 주소와 은신처를 묻자 “잘 모른다. 빨리 죽여달라”하고 끝까지 대원들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가 남의 손에 넘어가고 우리의 존재가 없어지는데 나라를 되찾겠다고 분연히 일어나 목숨걸고, 적과 싸운 그 정신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를 잡기 위하여 혈안이 된 일본수비대의 추적을 2년간이나 따돌린 신출귀몰한 전술도 대단했다고 본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굶주림과 불안한 밤을 맞으면서 버텨온 의병들에게 우리는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가족을 버리고 사방을 떠돌았기에 자식도 만들지 못하여 후손도 변변치 않다. 서병희 선생은 친척 중에서 그 대를 이어오고 있어서 퍽 다행이다.

국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2008년 달성 서씨 문중에서 재실을 건립하여 위패를 모시고 그 광장에 서병희 의병장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2009년 시의 지원을 받아 시민의 이름으로 건립한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에 그의 이름과 상훈을 기록하여 매년 추모하고 있으며 금년에 준공될 충렬사에도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향을 드릴 계획이다.

자료출처
양산항일독립운동사(2009, 양산향토사연구회)


일본 상인들에게 고하노라.

무릇 동양의 삼국은 옛날부터 솥발의 형세였으며 사람들도 같은 인종이다. 그러니 급한 일이 생기면 서로 구원하고 혼란이 있으면 서로 돕는 것이 과연 이웃에 사는 자들의 본의일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귀국은 무슨 외람된 생각으로 옛날 임진년(壬辰年)에 우리나라와 싸웠으며 그 끝이 어떠하였는가. 또한 갑오년(甲午年)에 청국과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이익은 모르겠으나 삼국이 틈이 생겼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동양의 두터운 우의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대체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며 그 강약은 일반인 것이다. 지금 우리 대한은 간신들이 조정에 가득하고 정권은 이미 빼앗겼으나 초야에 있는 인민들의 충의는 아직도 남아있다. 충의를 능멸한다는 것은 만국의 공법(公法)에서 듣지도 못하였고 보지도 못했으며 오직, 귀국(貴國)일 뿐이다. 눈앞의 욕심으로 대체(大體)를 손상하고 우리나라 조야(朝野)의 무도한 무리들과 부동(附同)하여 충량(忠良)들을 살해하고 백성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었다. 이에 우선의 동정으로는 하지 못할 것이 없을 듯이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백성으로서 아무리 어리석은 남녀들이라도 임금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는 때를 당하면 결단코 목숨 바칠 마음만 있고 살기를 즐기는 마음은 가지지 않는다. 이것은 천성적으로 그런 것이니 뉘라서 금지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귀국과의 통상을 절대 금하려는 것은 우리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아끼는 고운 뜻을 지키도록 하려는 것이다. 바라건대 여러분들은 절대 우리를 핑계대지 말고 돌아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이란 놈과 각별히 더 의논하라. 그리하여 우리 동양으로 하여금 우의를 돈독케 하여 형제처럼 여기고, 서로 자주국가로서 그들 세력을 견지토록 하며, 깊은 원수를 풀어 만국에 원망 사는 일을 면하게 하라. 어찌 이것이 만전의 계책이 아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의병들을 귀국사람들은 폭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국의 이목이 있으니 과연 의병인지 폭도인지는 변명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밝혀질 것이다. 만약 잘못을 고칠 생각이 없거든 산재해 있는 일본인들은 모두 돌아갈 것이며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1909년 3월 10일
영남창의인 서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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