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박희숙 양산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 | ||
ⓒ |
장인의 손을 거쳐 나무토막이 당대의 조각품이 되고, 흙덩어리 하나가 후세에 길이 남는 불후의 예술품이 되듯이 우리들의 관심과 조언, 칭찬과 격려, 바람과 희망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큰 동력이자 밑거름인 것이다.
‘꽃’이란 시에서는 이름, 몸짓이나 향기, 눈짓 등이 무엇이 되게끔 하고 있다. 여기에서 꽃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특징으로서의 꽃이 아니라, 어떤 가치 있는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존재이며, 존재와 존재 사이의 의미와 관계를 확인하고 싶은 즉, 연대의식의 확산이며 존재의 보편적 삶의 질서에 대한 자아의 의지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꽃 속의 꽃에서 많은 의미를 찾고 싶은 것이다.
최근에 조동화 시인의 ‘나 하나 꽃피어’라는 시가 새삼 의미 있는 메시지를 주는 것을 느꼈다.
임진년 새해 첫날 누군가 나에게 보내온 휴대폰 문자처럼 말이다.
“깨와 소금을 섞으면 ‘깨소금’입니다. 그렇다면 깨와 설탕을 섞으면 무엇일까요? 바로 ‘깨달음’입니다. 지난해가 깨소금 같은 해였다면, 2012년 새해에는 하루하루 많은 경험 속에 깨달음을 느끼며 아름다운 한 해 장식하시길 기원합니다. 교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예^.^ 감사합니다”라는 마음과 함께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책 속의 미국 시애틀에 있는 어시장 풍경처럼, 피시(fish)철학이 떠오른다. 피시철학처럼 사는 것을 다듬어 보자.
나 먼저 바꾸자. 관계를 바꾸자. 일하는 방법을 바꾸자. 모두 것에 좋은 의미를 부여하자.
특히 나의 일을 재미있게 즐기며, 하루의 일을 통해 열정적인 에너지를 창출하도록 하는 방법을 잘 활용하다 보면 즐거운 나날이 이어져 행복한 일 년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유아교육을 하다 보면 유아기의 사고는 유포섭의 개념이 형성 안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꽃 20송이가 있다. 그 꽃은 튤립이 18송이이고 장미가 2송이이다. 그렇다면 튤립이 많니? 꽃이 많니? 물으면 아이들은 튤립이 많다고 말한다. 튤립이 꽃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간혹 성인들도 사리분별이 어두워 상위의 개념과 하위의 개념을 이해 못 하고, 요소요소와 부분부분에 연연하며, 크고 의의 있는 전체를 바라볼 줄 모르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옛말에도 사슴을 쫓는 자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또 작은 걸 탐하다 보면 큰 것을 잃는다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어떤 철학자는 살다 보면 때로는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있다고 하였다. 더불어 혼자서 부족하면 함께 어울려서 하나로는 설 수 없어 두 기둥으로 서는 사람 인(人)자처럼 상생공영하면서 깨와 설탕과 같이 공동체 의식을 함께하는 자세를 길러야 하겠다.
너와 내가 모여 우리가 되고, 우리가 모여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간다. 네가 꽃피우고 나도 꽃피우면 결국 풀밭이 온통 아름다운 (꽃)밭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새해에는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볼 줄 아는 갈매기의 꿈처럼 높고 크게 멀리 바라볼 줄 아는 자세를 길러야 하겠다. 항상 낮은 자세로 겸손함과 인격함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서.
<나하나 꽃피어>
조동화
나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 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