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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양산의 뿌리를 찾아서 - 인물로 보는 향토사 ⑦
만고충신 박제상(朴堤上)

양산시민신문 기자 416호 입력 2012/02/14 14:41 수정 2012.02.14 02:43
후세 삼강오륜의 표상이 된 공의 충효사상





박제상은 서기 362년에 삽양주(歃良州) 수두리(首頭里) (지금의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서 태어났다. 385년에 어사대부 간관(御使大夫 諫官), 388년에 종은대부 이찬(宗殷大夫 伊湌)의 벼슬에 올랐다가 395년 공의 나이 34세에 삽양주(歃良州)의 간(干)이 되었다.

공의 호는 관설당(觀雪堂)이고, 돌아가신 뒤에 붙여진 이름이 충열(忠烈)이다. 대아찬(大阿湌)이란 벼슬이 추증되었으며 단양군(丹陽君. 지금의 寧海)으로 봉해져서 영해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공의 유족으로는 금교 김씨 부인과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큰아들은 박문량으로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선생이다.
 
세 딸 아기(阿奇), 아영(阿榮), 아경(阿慶)을 두었는데 첫째 아기와 셋째 아경은 어머니 김교부인과 함께 치술령에서 망부석이 되었고, 둘째 아영은 미사흔과 결혼하였다. 금교부인은 나중에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되었다. 박제상 공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충효의 표상이다. 공의 충효정신은 고려와 조선에서도 삼강오륜의 표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양산에서 정신적인 충효의 중심인물로 받들고 있으며 해마다 열리는 삽량문화축전에서도 주 테마 인물이 박제상 공이다.



실성왕의 왕권찬탈에 반기


박제상 공이 삽량주 간으로 있을 당시 지배체제와 상황을 살펴보면 신라 제17대 내물왕 37년 서기 392년에 고구려, 백제 등 삼국이 매우 어수선하였다. 즉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2년으로 한창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고, 백제는 아신왕의 등극으로 고구려와의 힘겨루기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때이다. 내물왕은 조심스럽게 외교를 펼칠 필요가 있어 그의 사촌동생인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고, 그 후 10년이 지난 서기 401년에 실성이 불모에서 풀려나 귀국하였다, 그 이듬해에 내물왕이 병이 들어 승하하고 그의 아들들이 어려 실성이 정권을 찬탈하여 서기 402년에 신라 제18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실성의 부당한 왕권창탈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반정운동을 펼친 신하들이 여럿 있었는데 박제상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실성왕은 왜국과 화평을 이유로 등극 즉시 내물왕의 셋째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왜국으로 인질로 보내고 10년 후에는 장수왕이 등극한 고구려에 둘째아들 복호(卜好)를 인질로 파견하였다. 실성왕은 자신의 신분이 위협당함을 알고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를 죽이려 했지만 발각되어 실패하고 오히려 이를 감지한 눌지가 실성을 제거하고 서기 417년 제19대 왕위에 오르게 된다. 눌지왕이 등극하기까지 박제상은 큰 역할을 한 것 같아 보인다. 눌지왕은 불모가 되어있는 두 동생을 구출해 올 것을 논의하게 되고 박제상 공이 그 임무를 담당하게 된다.


언변과 지략으로 볼모 구출


박제상은 먼저 고구려에 불모가 되어있는 복호(卜好)를 구하기 위하여 고구려에 들어가 장수왕을 만나 신라왕의 간절한 소망을 말하면서 “만약 대왕이 고맙게도 그를 돌려보낸다면 이는 마치 구우일모(九牛一毛)와 같아 대왕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으나 우리 임금은 한없이 대왕의 유덕함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영리한 논변으로 복호를 구출하였다.

박제상은 왜에 불모로 있는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기 위하여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쳐온 것으로 왜왕을 속이고 미사흔을 구출해 냈지만 그 일이 탄로가 나서 왜에 잡혔다. 왜왕이 박제상을 옥에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몰래 네 나라 왕자를 보냈느냐”

“나는 신라의 신하요, 왜의 신하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려했을 따름이요. 어찌 감히 그대에게 말을 하리오”

왜왕이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나의 신하가 되겠다고 했는데 신라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받아야 하리라. 만약 나의 신하가 되겠다고 말한다면 높은 벼슬을 내리리라”

“차라리 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오,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의 벼슬을 받지 않겠소”

왜왕은 화가 나서 제상의 발바닥 가죽을 벗겨낸 뒤 갈대를 잘라놓고 그 위로 걷게 했다. 그러면서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나는 신라의 신하다”

또 뜨거운 철판위에 세워놓고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나는 신라의 신하다”

왜왕은 박제상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木島)에서 불태워 죽였다.

이렇게 해서 박제상 공은 왜나라에서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우리나라의 수숫대가 붉은 것은 박제상의 충성스러운 피의 흔적이라는 이야기를 어릴 때 많이 들었다. 이 이야기는 1845년에 양산군수 한긍인이 만고충신 박제상 공의 비를 세우면서 그 비문에 “계집종이나 김매는 사내아이도 모두 능히 이야기할 줄 안다”라고 새겨놓았다.


계속되는 추모사업


박제상 공은 양산에서 징심헌을 짓고 그 곳에서 징심록을 편찬하였다. 공은 신라왕실 도서관 보문전 이찬(伊   )의 관직에 있을 때 우리나라 고대 선도역사를 정리한 여러 서적들을 열람하고 향리인 양산에서 징심록 제작에 몰두한 것 같다.

박제상 공이 순절하고 난 뒤 당시 신라 삽량민이 세운 유사비(遺思碑)는 징심헌 곁에 있었을 것으로 보아진다. 천여년이 지난 15세기경에는 양산의 읍성내에 비각으로 보존되어오다가 1680년 군수 조현경에 의하여 중건을 보아 서헌(西軒)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1684년 화재로 객사와 함께 소실되고 1689년에 군수 류정휘가 다시 재건하였으나 1697년 겨울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1845년 군수 한긍인이 비가 낡고 퇴색하여 알아볼 수가 없어 새 비를 객사서편에 세웠는데 그 이듬해인 1846년 공의 후손 규승(奎昇)이 비각을 세우고 그 기문에 박제상이 지은 제징심헌 시판(詩板)이 있고 점필재 김공의 시판과 박규승의 시판도 함께 걸려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읍성은 허물어지고 비각과 시판은 사라지고 어떤 읍민에 의하여 비석은 현 문화원 뒤 느티나무 아래에 다른 비석과 함께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해방 후 1949년 뜻있는 인사들이 춘추계를 조직하고 이 비석을 춘추원에 옮겨 삼조의열단을 설단하며 매년 한차례 향사를 지내며 공의 충효정신을 시민과 함께 널리 기리고 있다.


효충사를 세워 혼을 모시다


1960년 향토사학자 안종석 선생께서 상북면 효충리에 사비를 들여 10평정도의 사당을 지어 박제상 공과 그 아들 박문량(백결)의 초상화를 봉안하여 제향하였다. 그 후 1971년 양산군의 지원으로 담장을 설치하고 1977년 태창기업의 도움으로 조경시설을 갖춘 뒤 1988년 양산춘추계의 지원으로 지금의 건물인 효충사로 개축하였다. 1988년 12월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향사는 매년 3월 중정일(仲丁日)에 효충계원들이 주관이 되어 제향하여 오다가 삼조의열단 제향과 중복성이 있어 1988년부터 향사가 중단되고 있다.

이 밖에도 충남 공주의 계룡산 동학사 옆에 박제상 공을 모신 동계사는 고려 태조의 명으로 건립돼 1년에 두 번 대제를 받들고 있다. 울주군 두동면 치산서원은 박제상의 부인과 두 딸을 모시는 사당이 있던 자리에 1997년 새로 건립됐다. 이듬해 경남도지방문화재 제90호로 지정받았는데 박제상 공의 위패를 모신 충렬묘(忠烈廟)와 그 아래 김교 부인의 위패를 모신 신모사(神母祠)와 그 옆에 두 딸의 위패를 모신 쌍정려(雙旌閭)가 있고 그 아래 관리사가 있다. 매년 음력3월 울주군수를 비롯한 지역유지와 영해박씨 대종회에서 참석하여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자료출처
효충사약사 1982/안종석
양산읍사 2009/읍사편찬위원


글 싣는 순서


1. 삼장수는 누구인가?
2. 송담서원과 백수회
3. 소노서원과 정호인ㆍ호의 형제
4. 소계사와 안근
5. 상해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윤현진
6. 서병희 의병부대의 항일투쟁
7. 만고충신 박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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