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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상 목사 평산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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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시작을 가깝게는 3.1 운동에 두고 있다.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해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 기미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우리 조선은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똑똑히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지난 주간 필자는 중국 항저우(杭州)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저우 구지기념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항저우는 중국 절강성의 성도로 전당강의 하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에 서호(西湖)가 자리 잡고 있어 소저우(蘇州)와 함께 중국에서도 경치가 좋은 도시로 유명하다.
당시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우리나라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우리의 정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일본의 감시와 무자비한 탄압이 심했으므로 국외에 근거지를 둘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세우고 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이라 했으며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했다. 임시 정부는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의 지시를 받고 홍커우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을 즉사시킨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3년간 주 활동 무대였던 상해를 떠나 유랑의 시대를 시작했는데, 절강성 항저우로 이전해 ‘항저우에서의 시기’를 보내게 됐다.
장성로 호변촌, 학사로 사흠방, 청태 제2여사 등 지역에는 임시정부 요원들의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남겨 두고 있다. 그리고 이곳 항저우에서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독립당 기관지인 ‘진광(震光)’을 발행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해체 위기 속에서도 김구 선생과 차리석, 송병조, 김철 등 동지들은 뜻을 모아서 항일하였고 끝끝내 항일 광복투쟁의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되었다.
3.1 운동 93주년을 맞아 양산에서도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의지를 드러냈던 ‘양산 3.1 만세운동’이 재현된다. 다시 한 번 이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흘렸던 선조들의 고귀한 피를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