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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교단일기]천천히,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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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천천히, 조금씩…

양산시민신문 기자 420호 입력 2012/03/13 14:47 수정 2012.03.13 02:49




 
↑↑ 안순영
웅상고등학교 교사
 
첫 수업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홉 명이나 지각을 했다. 다른 반은 지각생이 없거나, 한두 명인데 우리반은 무더기 지각이다. 고3 담임을 맡아 며칠 전부터 긴장하고 있던 내 기대와 달리 너무나도 느슨한 학생들. 책이라고는 한 권도 없이 빈 책상에 두 손만 올려놓고 있는 녀석들이 태반. 3월인데, 고3인데, 첫 등교인데,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놈들을 도대체 어찌하나? “너희가 고3이냐”며 다그치고 싶었다. 잔소리의 소나기를 쏟아붓고 싶었다. 하지만 내년이면 군대에 갈지도 모를 머리 굵은 녀석들이기에, 아침마다 나눠주는 쪽지 통신(학급 신문)에 학생들의 이름과 함께 이렇게 썼다.


-자신의 복장 상태를 자발적으로 점검할 줄 아는 모범적인 학생으로, 개학 첫날부터 스스로 교복을 단정히 입고 오는 성실함과 준비성이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는 첫 주, 평소보다 10분 앞당겨진 등교 시각에도 불구하고 지각하지 않고 제시간에 교실에 도착하는 모습에서 사회생활의 기본인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학생임을 알 수 있어 믿음직합니다.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어 아침마다 호통치기보다는 긍정적인 모습을 격려해 주고 싶었다. 학생들 스스로 잘하고자 하는 마음을 북돋아 주고 싶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할 때만 변할 수 있고 위협으로 인한 변화는 길게 가지 못하니까. 나는 조금씩 천천히 녀석들이 스스로 변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돕고 싶었다. 그래서 그저 조용히 아침마다 쪽지 통신을 만들었다.


-개학하고 당겨진 등교 시간에 적응을 하지 못해 한 번 지각했으나, 다음날 바로 등교 시각을 제대로 지키는 것으로 보아 자기 잘못을 스스로 인식하고 고치려는 노력하는 학생으로 앞으로 많은 발전이 기대됩니다.
-개학 직후 청소용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많은 학생이 빗자루로 쓰레기를 쓸기만 하고 누군가 담겠지, 하면서 자리를 떴을 때, 쓰레받기 대신 이면지를 사용하여 쓰레기를 담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모습에서 창의성과 성실함, 책임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켓, 넥타이, 명찰을 모두 준비하여 흠 잡을 데 없이 교복 정장을 갖춰 입고 오는 단정함이 보기 좋고, 그 단정함을 계속 유지하는 마음가짐과 준비성이 학교생활에 성실히 임하는 자세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리고 개학 일주일이 지난 오늘 1, 2학년은 쉬는 토요일. 3학년만 유일하게 등교해서 자습하는 날. 우리 반 학생 전원이 지각하지 않았다. 조금씩 천천히 다가가기로 결정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돼 나는 몹시 기쁘다. 그리고 내 마음을 알아준 우리 반 학생들이 자랑스럽다. 내일 쪽지 통신에는 또 어떤 좋은 모습을 쓸까? 행복한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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