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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유적(지명)으로 보는 향토사 ① 양산읍성(邑城)
굽이굽이 선조의 숨결 가득한 역사의 중심지

양산시민신문 기자 420호 입력 2012/03/13 16:01 수정 2012.03.13 04:04





읍성은 지금의 행정단위인 읍(邑)의 성이 아니고, 양산고을 전체의 중심도시에 있는 성을 말한다. 양산읍성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 명확하지 않다. 서기 463년 신라 자비왕 6년에 ‘왜인이 삽량성을 침범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삽량성이 양산읍성의 최초라고 짐작이 된다. 그렇다고 보면 양산읍성은 지금부터 약 1천600년 전에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때 조성돼 여러 차례 증ㆍ개축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양산읍성은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지고 다시 쌓고 하는 작업을 여러 차례 거듭하였다. 서기 687년 신라 신문왕 7년에 “양주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천260보였다”는 기록이 있고, 서기 1381년 고려 우왕 7년에 왜적이 양산을 침범하여 성이 허물어지고 양산백성들이 양산에 속한 동평현(지금의 부산 당감동)에 성을 쌓고 옮겨 살았다. 그 후 1388년 고려 우왕 14년에 읍성을 쌓기 시작하여 1390년 공양왕 2년에 성을 완성하여 양산백성이 고향을 찾아와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당시 양산에 속해있는 현이 기장현과 동래현 그리고 동평현까지 광활한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은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개축과 중축을 시행해오다 서기 1492년 조선 성종 23년에 성을 완성하였는데 지금의 성터는 이때 조성된 읍성이다.


지금의 중앙동사무소가 성내 중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읍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3천710척이요, 높이가 13척이고 성 안에 5개의 우물과 못 1개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양산군읍지(1878년) 기록에 의하면 북문, 동문, 서문 등 세 개의 문이 있었고, 성안에는 관청, 객사, 쌍벽루, 창포정, 창고, 옥(獄)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서기 1912년 일제가 조선 지명조사에 의하여 일제 측량을 실시하면서 양산의 지적도를 작성했는데 그 지적도 상에 읍성의 모양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성벽의 길이는 약 1천500미터이고 폭은 서쪽은 2~3미터 남쪽은 4~5미터에 이르고 있다. 읍성의 북쪽 끝은 북부동 216번지이고 서쪽 끝은 북부동 422번지, 남쪽 끝은 중부동 176번지, 동쪽 끝은 북부동 295번지이며 전체 타원형의 형세를 갖추었다.

성문의 위치를 살펴보면 북문은 북부동 209번지(희망고개 부근), 서문은 북부동 424번지, 동문은 중부동 295번지, 남문은 중부동 269번지로 추정된다. 즉 지금 성내에 있는 중요건물은 희망고개, 양산초등학교 운동장 일부, 포교당, 토여도예, 중앙의원, 양산호텔, 노인회관, 중앙동사무소, 문화원, 등기소, 옛 한사랑예식장 등이다.


일제에 의한 읍성의 조직적인 파괴


일제는 조선의 강점기에 성벽을 조직적으로 훼철하고 그곳에 도로를 관통시키는 작업을 시행했다. 양산읍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2년에 작성한 지적도에는 확연히 읍성이 그려져 있으나 1913년 읍성을 관통하는 신작로를 개설하였고, 파괴된 성곽 돌을 사용하여 저지대 매립용으로 사용하였다. 1920년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의하여 북정동에 있는 부부총을 발굴한 일본인 학자 오가와 케이키치(小川敬吉)의 조사보고서를 보면 양산읍내의 읍성은 반쯤 허물어져 군청과 경찰서 우체국을 둘러싸고 있다고 기록하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상당한 성벽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35년을 거치면서 대부분 인위적으로 훼손되거나 또는 자연적으로 허물어지고 현재는 6~7개소에 부분적인 성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중 특히 중부동 181번지에는 성벽이 약 15미터, 높이 2미터 규모의 원형이 남아있다. 더 훼손되기 전에 보존대책이 필요한 곳이다.


향토역사의 중심지였던 읍성 내
 

고려시대는 이곳을 왜구의 방어를 위한 전진기지로 활용했고, 마을 이름도 성내리였다. 성 안에는 수많은 역사의 이야기를 안고 있다. 조선시대는 쌍벽루가 있어 유명인의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지나며 주옥같은 시를 남겼고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일본식 군청과 경찰서를 짓고 모든 건물을 일본화해 나갔다. 일제에 억압받은 양산백성은 일본에 항거하다 많은 희생을 당하였는데 착취에 견디다못해 일으킨 농민운동이 그것이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활동한 흔적이 있고,  6.25 전쟁 때는 보도연맹으로 희생된 양민들이 학살현장으로 끌려갈 때도 이곳에 모여서 많은 애환을 남겼다. 양산의 수많은 역사 이야기를 읍성 안에서 함축할 수 있다.


읍성을 복원해 후세교육에 활용해야


향토의 역사를 모르는 젊은이는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읍성을 복원하여 우리 조상들의 애환을 함께 살린다면 더욱 빛나는 교육의 도시가 되지 않을까. 전체 복원은 불가능하니 우선 읍성의 학술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지표조사 등을 통하여 정확한 읍성의 형태와 성문의 위치, 성내 각종 건물들의 위치 등을 조사하여 읍성을 기록물로 남기고 복원 가능한 부분을 찾아서 복원하면 될 것이다. 성 안의 역사복원은 아사(衙舍)를 복원하여 전체의 중심을 잡고 의춘학원, 3.1운동, 농민경찰서습격사건, 보도연맹 학살자집결창고(목화창고)등을 눈으로 보고 알 수 있도록 복원하는 한편, 조형물을 만들어 후세에 교훈을 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료 출처 : 양산문화 제21호(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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