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기획/특집

유적(지명)으로 보는 향토사
사방이 눈에 들어오는 전략적 요충지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2/04/09 09:36 수정 2012.04.09 09:39
② 북부동산성(山城)과 중부동고분군(古墳群)




↑↑ 산 정상을 둘러싸고 9부능선을 따라 축조된 북부동 산성 터

북부동산성은 양산시 북부동 산 4-2번지와 산 4-6번지에 있는데 해발 287.8m의 높이로 산 정상으로부터 9부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테뫼식 산성은 봉우리들을 둘러쌓아 성을 축조한 것으로 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수평으로 하여 둘러싼 형태다.

성내의 면적은 205,785㎡로 되어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이 북부동에 속해 있어 북부동산성이라 하는데 이 산성은 1963년 사적 98호로 지정되었다. 옛날에는 양산읍 소재지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고 하여 동산(東山)이라 하였고 따라서 성(城) 이름을 부를 때 ‘동산성’이라고도 불렀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권22 양산군 고적 조에 “고산성(古山城)은 군 동쪽 3리에 있는데 석축으로 쌓았다” 라는 기록이 있어 그 고산성이 이 북부동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러니까 북부동산성,동산성, 고산성 모두 같은 지명이다.

---------------------------------------------------------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낙동강 따라 오는 적들 한눈에


성(城)의 남쪽으로는 다방천이 흐르고 서쪽의 양산천과 연결되며 낙동강에서 양산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초입에 위치해 있고 서쪽으로는 양산천을 사이에 두고 마고산성을 대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성황산성과 마주하고 있어 이곳에 올라보면 양산천을 중심으로 호포에서 올라오는 적들을 한눈에 살펴 볼 수 있어 그야말로 전략적 요충지임을 짐작케 한다.


신기산성과 함께 신라 때 쌓아


북부동 산성의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463년(자비마립간 6년)에 “봄 2월에 왜인이 삽량성에 침범하였으나 왕이 벌지(伐智)와 덕지(德智)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길에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마주 공격하여 이를 크게 이겼다. 왜인이 자주 국경지방을 침범함으로 왕은 변경의 두 곳에 성을 쌓았다”(春二月 倭人侵    良城 不克而去 王命伐智德智 領兵伏候於路, 要擊, 大敗之, 王以倭人屬侵疆場, 緣邊築二城)라는 기록이 있고 또 서기 673년 (신라 문무왕 13년) 9월에 삽량주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는 기록과 서기 687년(신문왕 7년)에 삽량에 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낙동강 하구를 통하여 침입해오는 왜인을 막기 위하여 삽량주에 여러 차례에 걸쳐 성을 쌓은 사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북부동산성이 기록에 나타난 바로 그 산성인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산성 내에서 신라토기 조각이 많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축성한 것이 분명하다. 북부동산성 북쪽의 명곡천 건너편에 있는 성황산에도 비슷한 규모의 신기리산성이 있어 자비왕 때의 기록처럼 두 개의 성의 형태를 이루고 있고 성곽 내부와 주변에 채집되는 유물과 문허기록으로 보아 5세기 중엽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도굴되고 남은 중부동고분군


동산의 북부동산성 아래에는 신라시대의 고분군(古墳群)이 널려 있다. 산성 아래에는 대부분 고분(옛날무덤)이 있는데 이곳 산성은 북부동산성이고 그 아래 무덤은 중부동고분으로 사적 제 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고분이 위치한 곳이 중부동 산 1번지이기 때문이다.

고분들은 능선의 줄기를 따라 큰 무덤들이 줄지어 있고 그 옆면으로 다소 작은 규모의 무덤봉분과 석곽들이 밀집해 있다. 이 고분군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도굴꾼에 의하여 무참히 훼손되었다. 무덤들이 대부분 파헤쳐지고 우리 조상들은 그 무덤 속에 들어 있었던 부장품들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도 모른 채 도굴꾼이 파놓은 유물들을 지게로 운반해주고 운반비만 챙겨 받았다. 도굴꾼이 도굴하면서 다녔던 그 길이 지금은 시민들의 산책로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채집된 유물로는 유개고배, 기대, 장경호, 대옹, 단경호 등이다. 조성연대는 산성과 비슷한 시기로 보인다.


2천년전 삶터 흔적 다방동 패총


동산(東山) 남쪽 구릉부에 삼한시대의 패총(貝塚, 조개더미)이 분포되어 있다. 조개더미는 마을사람들이 강에서 나오는 조개류의 알갱이를 먹고 그 껍질을 내다버린 일종의 폐기장이다. 이 조개더미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조개껍질과 동물의 뼈를 보고 그 시대의 인류생활, 환경 등을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다방동패총은 1965년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이 조개더미에서는 재첩, 백합, 홍합, 참굴, 소라, 다슬기, 논우렁이, 갯고동 및 담수패류와 사슴과 멧돼지 등 동물뼈가 채집되었다. 이곳에 패총 유적이 많이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삼한시대인 기원전·후 300년경 사이에 이곳에 많은 주민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산의 주산으로 보전돼야


북부동산성과 중부동고분군, 다방동패총 이것이 각각 그 이름이 다르지만 모두 같은 동산(東山) 안에 있다. 산성은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있다. 그러나 성의 동편에는 집터와 우물터가 남아있고 망대(望臺)와 장대(壯大)로 추정되는 지형이 있다. 고분군은 도굴꾼이 도굴하면서 다녔던 그 길을 우리들의 산책로로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무덤사이로 산책하고 있고 파헤쳐진 무덤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먼 조상들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다. 조개더미는 거의 밭으로 가꾸고 있어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들게 되어있다.

동산 아랫부분의 일부는 택지조성예정지구로 고시된 적이 있고 국도의 우회도로도 계획되어 있다. 동산(東山)이 다시 한 번 양산의 주산(主山)이 되어 양산인의 자존심을 지킬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보전대책이 꼭 필요하다.


자료출처: 양산문화 2010
/양산문화원
양산시 문화유적 정밀지표조사보고 1996/양산시

↑↑ 도굴꾼에 의해 파헤쳐진 고분 흔적

↑↑ 중부동고분군 사이로 난 산책로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