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찰스, 스티비 원더, 호세 펠리치아노, 다이앤 슈어는 시각장애를 극복한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하지만 시각장애를 딛고 일어선 클래식 성악가는 드물다. 악보를 보고 정확한 발성을 배우는 데 시각장애는 치명적인 결점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각장애의 한계를 딛고 성악가를 꿈꾸는 이가 있다. 조정빈(12, 상북면) 어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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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2개월 소아마비로 시각장애
선생님 추천으로 노래 재능 발견
정빈이는 시각장애 1급이다. 빛의 밝기를 겨우 인식할 수 있는 정도다. 칠삭둥이로 태어난 지 갓 두 달쯤 지났을 때 소아마비가 찾아왔고, 뇌혈관이 시신경을 건드렸다. 생후 7개월 만에 정빈이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오른쪽눈을 수술 받았고, 한 달 뒤 남은 왼쪽눈도 수술 받았다. 정빈이는 수정체를 걷어내는 고된 수술 과정을 무사히 견뎌냈고, 사물의 형체는 알아볼 수 없지만 다행히 빛을 인식할 수 있게 됐다.
시각장애로 부산맹학교에 입학한 정빈이는 여느 또래들과 비슷하게 평범한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동요를 좋아하긴 했지만 특출난 재능은 없는 듯했다. 그러다 2학년 때 학교선생님의 추천으로 오디션을 보게 됐다. 목소리가 고우니 노래를 배워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5명의 동요 작곡가들의 모임인 ‘다섯손가락’의 눈에 띄어 활동을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에 노래를 부르게 된 정빈이의 삶은 달라졌다.
동래구교육청이 주최하는 학생예능대회에서 시각장애인으로는 유일하게 2009년, 2011년 대회에 출전했다. 2011년에는 엄정행 콩쿠르에서 금상을, 2012년에는 윤이상동요제에서 인기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지역 곳곳에서 공연 요청은 끊이지 않고 있다.
시각 대신 청각으로 악보 암기
마음 어루만지는 능력 ‘탁월’
정빈이의 연습은 힘들 때가 많다. 악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청각에 의지해 악보를 외워야 한다. 점자 악보가 있지만 구하기 어려울뿐더러 점자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어린 정빈이가 인식하기 힘들다. 그래서 음악을 녹음해서 휴대전화에 저장해 여러 번 들으면서 곡을 익힌다. 대신 한 번 들은 멜로디는 잘 기억한다. 시각은 장애가 있지만 청각이 발달한 것이다.
정빈이의 가장 큰 강점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능력이다. 지난 3월 특별상을 수상했던 윤이상동요제에서 정빈이의 무대에 눈물 짓는 이도 여럿 있었을 정도다.
정빈이를 가르치고 있는 윤상훈 선생은 “음정이 정확하고 반응이 빠른 것이 정빈이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윤 선생은 “정확한 발성을 위해서는 공간에 대한 개념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어렵다. 같은 ‘아’ 발음이라도 발성에 따라 입모양이 달라지는데 그것을 일일이 손으로 잡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윤 선생은 정빈이의 손바닥을 본인의 입에 가져다 대고 정확한 입모양을 터득해 발성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롤모델은 성악가 조수미
조수미 곡 들으며 꿈 키워
12살 정빈이의 꿈은 조수미처럼 성악가가 되는 것이다. 어떤 성악가를 좋아하느냐의 질문에 정빈이는 “조수미 선생님의 목소리는 정말 고운 것 같다. 조수미 선생님이 제일 좋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시각장애인 전용 통신망에 접속해서 조수미의 음악들을 주로 들으며 성각가의 꿈을 키우고 있다.
어머니 장유정(42) 씨는 “동래에 있는 부산맹학교까지 가려면 상북 집에서 7시 50분~8시에는 나서야 하고, 시각장애아동은 도와주지 않으면 이동 자체가 불가능해 힘든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폭이 넓지 않은 만큼 정빈이가 성악가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은 게 장 씨의 마음이다. 장 씨는 “예술가의 길이 경제적으로도 힘들다고 하는데, 어렸을 때 정빈이가 고생했던 것보다야 덜 힘들지 않겠느냐. 어떻게 해서든 정빈이의 꿈을 응원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