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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광 효성음악학원 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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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본지 10여년이 훌쩍 지났지만 나에게 문득문득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해변에 쓸쓸히 ‘서 있는’ 피아노 한 대! 에리히 프롬은 두 종류의 인간을 말한다. 하나는 존재지향적인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지향적인 인간이다. 소유지향적인 인간 스튜어트에게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 만족이 될 수 없고 돈으로 계산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피아노라는 물건은 바닷가에 굴러다니는 조개껍데기나,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고 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에이다에게 피아노는 그녀의 눈물과 고난, 경이의 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녀의 언어였고, ‘시’였으며 그녀 삶의 깊이와 충만함을 부여하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보면 유토피아인들은 ‘금’이라는 단어를 경멸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토피아가 아닌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소유는 존재보다 더 절실한 무엇인 것 같다. 소유가 과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음악을 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집집마다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 하나 정도는 다 있을 것이다. 그 악기들에 우리는 스튜어트 같이 소유의 대상으로 박대하진 않았는지 오늘 한 번 돌아보고자 한다.
내 어린 시절 우리 집에 피아노를 갖게 된 역사적 순간이 있었다. 당시의 피아노는 나에게 황홀함이었고 자랑이었고 꿈이었다. 이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피아노는 나에게 운명이 되었고 지금 나는 그 길 위에 있다. 피아노를 내 삶의 수단으로 여기고 그것이 내 소유욕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 나 또한 그것을 쓰레기통 옆에 밀쳐내려 하진 않았는지 반성해본다. 그래서 난 음악은 자체의 즐거움이어야지 어떤 수단이나 방법이 되는 걸 경계하고 싶다. 어린 날 설렘으로 만났던 그 피아노 경험을 살려내어 존재지향의 삶의 태도로 살고 싶다. 하이데거는 사물이 가진 고유한 광채를 ‘존재의 빛’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존재자(악기들)가 우리를 통해 ‘더 존재의 빛’이 되도록 하는 것이 나의 의무가 되길 원한다.
악기에 대한 사유를 ‘소유’에서 ‘존재’로 돌릴 것을 역설하며 달콤한 벚꽃의 아스라한 향기 맡으며 성찰의 여행을 떠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