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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에 대한 가치를 지키는 일
낙동강 종주 자전거길에 묻힌
‘황산강 베랑길’을 개탄한다
옛 역사의 흔적을 복원한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충분한 고증을 거쳐 그 유적의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사실(史實)에 중점을 두고 복원해야 한다. 최근 양산시의 황산강 베랑길 복원사업 추진 과정은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많다.
지난달 시는 낙동강 종주 자전거길의 준공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부산 낙동강 하구둑에서 경북 안동댐까지 389km에 이르는 낙동강 종주 자전거길 중에 우리 구간은 동면 호포에서 원동 용당까지 20km가 조성됐다. 시가 이미 추진 중이던 ‘황산강 베랑길 복원사업’ 구간인 물금취수장~원동취수장의 2.2km 구간이 여기에 포함됐다.
자전거길 준공을 축하하면서 나동연 시장은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이 되도록 인프라 구축에 나서라고 당부했다. 주변 유적을 소재로 스토리텔링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왕 정부 돈으로 명품 자전거길이 완성된 마당이니만큼 이를 관광상품으로 활용을 극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무언가 찜찜하다.
이에 앞서 시는 지난해 4월 황산잔도 복원계획을 밝히면서 “양산의 문화와 역사의 현장을 복원하는 것으로 그동안 주민들과 향토 사학자들 사이에서 복원 필요성이 제기됐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덧붙여 “벼랑에 나무를 선반처럼 내메어 만든 ‘잔도’라는 독특한 지리적 형태를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둘 예정”이라고 했다. 이 사업은 행정안전부가 시행한 ‘친환경 생활공간 조성사업’에 선정되면서 지원받게 된 국비를 재원으로 추진하게 됐다. 물론 당시에는 낙동강 종주 자전거길이라는 구상은 나오지도 않을 때였다.
잔도(棧道)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흔적이다. 잔도는 깎아지른 벼랑에 나무를 선반처럼 내메어 만든 통행로로 아찔한 구조이지만 통행을 위해서 꼭 필요한 길이었다. 물금에서 화제로 넘어가는 지방도가 개설되기 전이니까 상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경상도의 부산과 한양을 잇는 최단거리의 간선도로인 영남대로에는 3곳의 잔도가 있었다. 우리 지역의 황산잔도 외에 밀양의 작천잔도, 문경의 관갑천잔도가 그것이다. 향토 사학계에서는 황산잔도 복원사업을 추진한다는 시의 발표에 크게 고무되었다. 신라 때 충신인 박제상 공을 기리는 정신문화사업을 울산시에 뺏겨 버리고, 생가와 사당에 대한 성역화사업도 지지부진한 시 문화정책에 대한 불만을 완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나아가 과거의 황산역을 복원하고 임경대와 용화사 미륵불을 비롯한 주변의 문화유적들을 연계한다면 양산 관광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 사회단체에서는 전문가를 초빙해 세미나까지 열면서 문화유산을 활용한 관광상품화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황산강 베랑길’ 복원사업은 처음부터 문화정책으로 출발하지 못했다. 국비와 시비 10억원이 투입된 1차 사업은 설계에서 역사적 고증이나 문화적 가치의 발현을 추구하는 노력이 배제됐다. 향토사학계에 자문을 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잔도라는 역사유적의 복원이 아니라 잔도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통행로를 만드는 토목공사의 하나로 진행되고 말았다. 여기에다 낙동강 종주 자전거길 사업을 유치하면서 아예 강변 경치를 감상하는 드라이브 길로 변모한 것이다.
애당초 시의 사업 추진 초기단계에서 문화관광부서가 아닌 개발사업부서에서 제각각 자기들 사정에 맞는 방법으로 업무를 추진한 결과다. 지역의 남다른 문화유산을 복원하면서 전체 사업을 조정하는 포스트가 정해지지 않은 채 추진하다 보니 원래 목적은 상실되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자전거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명품 자전거길의 조성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전국의 동호인들이 멋진 풍광을 배경으로 자전거 여행을 즐기기 위해 양산을 찾는다면 그 또한 나쁠 게 없다. 문제는 희귀한 역사적 유산 하나를 또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베랑은 벼랑의 양산 사투리다. 벼랑길을 뜻하는 잔도는 그 공사과정도 어렵고 특이하지만 원동 화제지방에서 물금과 양산 소재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행로로서 의미가 컸다. 상상해 보라. 오봉산 줄기가 강에 다달아 바위 절벽으로 떨어지는 그 곳에 나무 기둥과 발판을 만들어 매단 채 강물을 내려다보며 걸었을 우리의 선조들을. 복원이란 옛 형태와 위치적 근거를 필수요건으로 해야 한다.
시민들의 향토애를 북돋우고 선조의 업적을 통해 자긍심을 키워나갈 무형의 유산을 나무데크와 철제 난간, 그리고 아스팔트 포장길로 재탄생시킨 시의 개념없는 문화정책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