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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양산의 뿌리를 찾아서]
기획/특집

[양산의 뿌리를 찾아서]유적(지명)으로 보는 향토사신라 때 번성 증명하는 부부총과 금조총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2/05/08 14:49 수정 2012.06.12 11:41
신기동 산성과 북정동 고분군




신기동 산성은 신기동 산 20번지와 호계동 산 112번지에 걸쳐 있는데 해발 330.6m 높이의 정상부에 데뫼식 석축으로 만들어진 성이다. 성내 면적은 15만7천74㎡이고, 지금의 행정구역이 양산시 신기동에 속해 있기 때문에 신기동 산성이라 하며, 1963년 사적 제97호로 지정되었다.


옛날에는 양산읍 소재지에서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산성이라고도 불렀다. 1530년 조선 중종 때 발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양산군조에 보면 성황산(城隍山)은 ‘군청으로부터 동북쪽 5리에 있으며 진산이다’

(在郡東北五理鎭山)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산 이름이 옛날부터 성황산이라 하였고 따라서 산성의 이름도 성황산성(城隍山城)이라고 했다. 또 같은 책 양산군 성곽조에 성황산성의 “석축의 둘레는 4천368척이고 높이는 6척이며, 우물이 6개가 있고, 못이 2개가 있으며, 군수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石築周四千三百六十八尺高六尺內有井六之二有軍倉)라고 하여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산성은 신기동 산성이면서, 성황산성이라고도 하며 북산성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달라도 모두 같은 산성(山城)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 때 쌓은 전략 요충지


성(城)의 서쪽에는 양산천이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고 남쪽에는 명곡천이 서쪽으로 흘러 양산천으로 유입되고 동산성과 마주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성황산성은 동산성과 함께 남해안에서 낙동강, 양산천을 거쳐 북상하는 루트를 차단하기 위하여 축조된 산성으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성의 정상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약간 평탄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으며 남쪽 8부 능선에는 꽤 넓은 평지가 있어 경작지로 활용하고 있다. 성곽의 외부는 경사가 심하며 성의 형태는 대부분 파손되고 북쪽에 길이 약 200m, 높이 2m 정도는 원형으로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687년(신문왕 7년)에 삽량에 두 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부동 산성과 함께 5세기 중엽에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고장 지키는 성황사(城隍祠)


성황산 내에는 성황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사묘조에 성황사는 ‘세상에 전하기를 김인훈이 고려태조를 도와서 벼슬이 문하좌시중에 이르렀는데 그가 죽어서 이곳 사신(祠神)이 되었다’(世傳金忍訓佐高麗太祖位至門下左侍中死爲祠紳)라고 하였으므로 이곳에 성황사(城隍祠)를 지어 김인훈 장군을 사신으로 모시고 지역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성황사는 1991년 양산문화원이 양산시의 지원을 받아 옛집을 허물고 다시 지었다.


일제의 부부총(夫婦塚) 발굴


성황산성에서 서쪽을 향하여 여러 갈래 능선 위에 많은 고분들이 분포되어 있는데 북쪽 능선에 있는 고분이 북정동 고분군으로 고분이 있는 곳의 행정구역이 양산시 북정동 698번지이기 때문에 북정동 고분군이라 하며 사적 9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분군은 모두 신기동 산성 아래에 형성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서기 1920년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의하여 이 곳에 있는 무덤 1곳을 계획적으로 발굴했다. 일본인 고고학 전문가가 발굴을 지휘했는데 그의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무덤 속에서 높은 신분으로 추정되는 부부와 순장으로 추정되는 시신 3구가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무덤을 부부총이라고 이름짓게 되었다. 더 세밀한 분석 결과 남자가 먼저 죽어 묻히면서 함께 1명이 순장되고 부인은 몇 년 뒤에 죽어 묻히면서 함께 2명이 순장되어 모두 5명의 시신이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다만 매우 지체 높은 신분이라는 것만 추정할 뿐이다.

조성 시기는 여러가지 검증 결과 5세기 중반에서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서기 450년에서 500년 사이가 된다. 여기서 나온 출토품은 금동관을 비롯한 금동제 신발, 순금 귀걸이 등 중요 보물급 유물을 포함해 480여점이 출토되었는데, 현재 일본 도쿄 박물관 한국관에 전시되어 있다.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일본 수도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손으로 발굴한 금조총(金鳥塚)

1990년 4월에 동아대학교 박물관팀에서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 북정동 고분군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파헤쳐 본 고분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급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무덤의 피장자는 신분이 높은 여성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축조 시기는 부부총과 동일하거나 그보다 조금 늦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보인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출토된 것 중에 주목을 끄는 것은 금제조족(金製鳥足), 즉 금으로 만든 새의 다리 모형이다. 그래서 이 무덤을 금조총(金鳥塚)이라 이름지었다. 새는 옛날부터 죽은 자의 영혼을 천상으로 이끌어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새를 만들어 넣었는데 다리는 금이였기 때문에 형태가 남아있고 몸통은 다른 재질로 모두 부식되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금조족을 비롯 금귀걸이 등 국보급 유물을 포함해서 50여점이 발굴되었는데 현재 동아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으며 그중 금조족과 금귀걸이는 동 대학교 박물관 전시실에 전시되고 있다.


고분 아래 들어설 유물전시관


시는 북정동고분군의 서쪽 끝자락 부부총 아래에 양산유물전시관을 건립하고 있다. 이곳에 유물전시관을 짓는 이유는 여기에서 출토된 귀중한 유물들을 이곳에서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일본의 도쿄박물관 또는 국내의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전시 보관되고 있다. 언젠가는 이 유물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협조와 지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북정동고분군은 이미 도굴꾼에 의하여 모두 파헤쳐졌다. 그러나 다행히 일부는 복원이 되었고 앞으로 계속되는 복원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남아있는 고분들은 훼손된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그 방치된 고분 위로 성황산 등산길이 지나고 있다. 등산객들은 그것이 고분인줄도 모르고 다닌다. 파헤쳐진 고분 위로 다니기가 민망스럽다. 그러나 길이 그 길 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현재의 등산로를 다시 정비해 고분의 봉우리를 돌아갈 수 있도록 함이 옳을 것이다.


출처 양산읍지 /2009/중앙동,삼성동,강서동
양산사료총람 2006/양산향토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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