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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열린 양산예술제에서 양산예술인상을 받은 (사)한국사진협회 양산지부 자문위원 김석태(71, 하북면) 씨는 사진만 바라보며 45년 외길인생을 걸어왔다.
부산MBC 성우 하다 사진 입문
스튜디오 두 곳 열고 활동 시작
1942년 하북면에서 태어난 김 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간 뒤 고등학교까지 부산에서 마쳤다. 고교 졸업 후 처음 택한 길은 성우였다. 제1기 부산MBC 성우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곤 했던 김 씨는 성우 일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부업으로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산의 한 사진관에서 사진 ‘일’을 처음으로 시작해 2년 동안 일하다가 군에 입대했다. 제대한 뒤로는 본격적으로 사진에 몰두했다.
“그때는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지. 멋져 보이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좋았는지 그 이후로 카메라를 놓지 않았어”
30대 초반, 꿈에도 그리던 자신의 스튜디오를 하북면 신평마을에 열었다. 인근 삼성전관이 번창할 때라 수입도 괜찮았다. 10년 뒤 양산시내에 스튜디오를 추가로 개업했다. ‘석태는 돈을 찍는다’라는 말을 들을 만큼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스튜디오를 찾는 사진작가와의 교류도 이어져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양산시내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영업 사진만 하다가 끝났을 거다. 당시 하북은 일개 면소재지의 시골이라 활동할 사람이 없었는데, 양산시내에 내려오면서 함께 활동할 사람을 찾았다. 그렇게 어울리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모래언덕 아름다움에 반해 몰두
사진대전 입선에서 대상까지
이후 활동 반경은 점점 넓어졌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국내는 물론 아프리카를 제외한 대륙 모두를 밟아봤다.
그 가운데 강하게 기억 남는 것은 단연 사구(砂丘)이다. 사구를 처음 접한 곳은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장소인 부산 을숙도였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모래결에 반했고, 당시 작품은 국내에서 최고의 대회로 꼽히는 대한민국사진대전 첫 입선이라는 기쁨으로 돌아왔다. 그때 힘을 얻어 사구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대표작인 ‘인생행로’를 얻었다. 중국 둔황 밍사산의 사막에서 한 달 간 고생 끝에 얻은 작품 ‘인생행로’는 1995년 대한민국사진대전의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사막에서는 카메라가 예민해서 고장나기 쉬운데 한 달 간 머물렀지만 단 한 번도 고장은 없었다. 기종이 비교적 덜 예민한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운이 따라줬던 것 같다”
그렇게 사진작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겨준 ‘인생행로’는 1995년 당시 신문은 물론 1996년 편찬된 작문교과서에 실릴 만큼 반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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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대한민국사진대전 대상 수상작인 <인생행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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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두 발로 찍는 것
정직하게 살고 정직하게 찍어라
사진작가를 선택한 삶에 후회는 없다. 45년 인생은 누구보다 만족스러웠다. 국내·외를 다니면서 작품 활동을 원없이 했고, 사진작가로서의 큰 영광도 안았다. 이제 바람은 후배들과 작품 활동을 즐기며 인생을 정리하는 것이다.
칠순의 노 사진작가가 지역의 사진문화를 이끌어가게 될 후배 작가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어떤 것일까.
김 씨가 내놓은 첫 번째 대답은 ‘사진은 두 발로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발로 찍어야 하거든. 앉아서 생각만 가지고는 사진이 안 된다. ‘이곳에 가면 잘 나온다더라’ 같은 얘기에 끌려다니지 말고 직접 발로 뛰어다녀야 한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부지런히 찾아다니다 보면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어 꺼내놓은 두 번째 답은 ‘정직함’이었다.
“사진은 거짓말이 없다. 요즘은 컴퓨터로 합성할 수도, 색상도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고 정직하게 찍어야 좋은 작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력
-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ㆍ양산지부 제3대 지부장
- 대한민국사진대전ㆍ경남사진대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 한국사진문화상ㆍ경남사진문화상
(작품상) 수상
- (사)한송예술협회 고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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