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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동갑내기 친구에게 무풍한송길은
조금 특별한 추억의 한 페이지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 통도사 산문에서 출발해 무풍한송(無風寒松)길을 한참 걸어가고 있는데 여자아이 넷이서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간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웃느라 정신이 없다. 몇 살이냐고 물으니, 하북초등학교 6학년 동갑내기란다.
네 명 모두 친구나 가족이랑 통도사엔 자주 왔지만 오늘처럼 사람 많았던 적이 처음인지 신기하다는 반응이다. 6㎞를 끝까지 완주할 수 있겠냐는 걱정에 “힘들어도 잘 갈 수 있어요”라며 자신감을 내비친다.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동갑내기 친구들이지만 내년 걷기대회에서는 함께 걷지 못할 거란 생각에 벌써부터 아쉽다. 넷 중 수연이(사진 맨 오른쪽)가 올 10월에 태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한 마디 해보라는 요청에 “잘 가!”라며 농담처럼 얘기하지만 이내 섭섭함이 묻어난다. 태국 가서도 한국말 잊지 말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세 친구, 그리고 친구들에게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수연이에게 2012년 6월의 무풍한송길은 조금 특별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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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김다인(하북초6 이하 동일), 이승진, 김은희, 설수연 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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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에서 아들 부부에게 보내는
조금 특별한 출산 축하 메시지
13살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니 어느덧 통도사 성보박물관 앞. 아직 반도 오지 못했는데 체력은 바닥을 드러낸다. 잠깐 쉬었다 갈 요량으로 그늘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조금 희한한(?) 가족이 눈에 들어온다.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돌배기 정도로 보이는 아이를 안고 땀흘리며 걷고 있다. 옆에는 남편인 듯한 50대 아저씨가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막둥이일까, 아니면 특별한 사연이 있는 가족일까. 조심스럽게 다가가 “어떻게 대회에 오셨어요? 가족이신가요?”라고 여쭈어보니 아저씨가 웃으며 대답한다. “16개월 된 손녀딸인데요” 대회 이틀 전인 지난 1일 며느리가 손자를 낳아 잠시 손녀딸을 데리고 있다가 참가한 것이다.
남편 윤종권(53, 하북면) 씨는 “16개월 위에 5살 언니가 있어요. 1남 2녀인 거죠. 우리 가족이 내년에는 참가하면 인원이 두 배로 늘어날 겁니다”라며 기쁨을 드러낸다.
부인 김석준(54, 하북면) 씨의 자녀 자랑도 끝이 없다. 김 씨는 “요새 자식 셋 낳는 사람 잘 없잖아요. 거기에다 셋 모두 부모한테 손 안 벌리고 알아서 키우겠다 합디다. 어찌나 대견한지 몰라요”라며 웃는다.
윤 씨 부부는 걷기대회 참가해 아들네 출산을 특별하게 기념할 수 있게 돼 재밌다는 반응이다. 헤어지면서도 아들 부부에게 셋 모두 다 건강하게 잘 키우라는 축하 인사도 빠뜨리지 않았다.
윤 씨 부부와는 안양암으로 오르는 입구에서 헤어졌다. 통도사 설법전에서 지산마을을 거쳐 서리마을로 이어지는 코스(A)와 통도 8경 가운데 하나인 안양암 동대길 코스(B)의 갈림길이다. 비교적 평탄한 A코스와 달리 B코스는 오르막이 있는 데다 A코스보다 1㎞ 더 길다.
올해 B코스가 새롭게 추가됐다는 얘기에 호기심이 발동해 주제 파악도 못하고(?) 안양암으로 향했다. 역시나 곧장 후회가 밀려왔다. B코스를 택한 참가자가 많지 않은 데다 후발대라 홀로 쓸쓸히 걸었다. 체력도 바닥이었다. 그러다 A코스와 B코스가 만나는 지산마을에서 한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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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부인 김석준(54, 하북면) 씨와 남편 윤종권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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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벗 삼아 느린 걸음 허종영 씨 가족
길 위 가위바위보 놀이에 흠뻑
이 가족은 일명 ‘가위바위보’ 가족이다.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서더니 길 중간에 서서 가위바위보에 몰두한다. 가까이 가보니 가위바위보를 이긴 사람이 들고 있는 나뭇가지의 이파리를 한 장씩 다 떼어내는 놀이 중이다.
딸 승희(9)와 다경(7)이가 부인 최정애(36) 씨와 노는 것을 보던 아빠 허종영(42, 북정동) 씨는 “우리 어릴 때 많이 했던 놀이인데 애들한테 가르쳐주고 있었어요. 길가에 난 이파리를 보니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요”라 말한다.
별다른 장난감이 없던 그 시절엔 자연이 놀이터였다. 허 씨는 딸들에게 자연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늦은 것 같지 않느냐는 물음에 허 씨는 후발대로 출발한 데다 절에 들어가기도 하고, 계곡에서 아이들과 물고기 구경하느라 늦었단다.
이름은 걷기 ‘대회’이지만 1등도 꼴찌도 없다. 건강하게 걸으면 그만이니 아이들과 이곳저곳 살피며 걸어온 듯하다. 설사 꼴찌로 들어오면 어떠랴. 아이들과 즐겁게 걸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허 씨는 “첫째는 걷는 걸 안 좋아해서 오래 걸을 땐 징징대거나 주저앉아 어쩔 수 없이 업고 다녔는데, 오늘은 잘 따라온다”며 대견해하는 눈치다. 허 씨는 내년에도 기회가 되면 자연을 보고 즐기려 이곳을 다시 찾아오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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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종영 씨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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