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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호국보훈의 달 특집
1951년, 박인숙 어르신이 들려주는 그때 그시절

노미란 기자 yes_miran@ysnews.co.kr 입력 2012/06/12 10:45 수정 2012.06.12 07:53
희망고개서 마주친 비극

군 위문 공연하던 즐거움



↑↑ 1951년 당시 양산중 여학생들과 교사들. 원 왼쪽이 박인숙 어르신, 오른쪽이 합창단을 이끌었던 엄영섭 교사.


목화창고 앞뜰 시체더미 기억 여전히 ‘또렷’
양산중 교내 백골부대 주둔… 떠돌이 수업
엄영섭 선생에게 배운 노래로 군 위문 공연도


“학교를 가려면 희망고개를 지나가야 했다. 지금 양산문화원 건너편 자리에 목화창고가 있었는데, 산에서 내려온 공비 시체들이 그 창고 앞뜰에 줄지어 있었다. 가마니 거적을 덮어놔서 시체는 잘 안 보였지만”

올해 일흔일곱살이 된 박인숙(중부동) 씨에게 희망고개는 잊을 수 없는 장소다.

1951년 당시 열여섯이던 박 씨는 현재 북부동 양산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양산중학교에 다녔다. 양산중학교 학생 대부분이 학교를 오가며 지나가는 그 지점에 처형당한 공비 시체들이 줄지어 놓여있던 장면은 당시 양산중학교 학생들이라면 평생 기억하고 있을 전쟁의 아픈 단면이다. 박 씨에 따르면 목화창고 앞뜰에 시체가 뉘어져 있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어떤 애들은 겁도 나고 안 보려고 그 근처에서는 뛰어가기도 하고 그랬지. 또 당시 어른들이 하도 ‘빨갱이, 빨갱이’라 하기에 어린 마음에 친구들과 같이 혹시나 ‘눈이 진짜로 빨갛나’ 싶어서 일부러 목화창고 근처로 지나가보기도 하고 그랬다”

시대적 아픔은 교정에도 드리웠다. 양산중학교 본관에 백골부대가 주둔해 ‘떠돌이’ 수업을 받았던 것. 교내 목재 가건물은 물론 양산향교, 춘추원을 떠돌았다. 심지어 천막이나 나무 밑에 칠판 하나 가져다 놓고 수업 받은 적도 있다. 

박 씨에겐 또 한 번 등골 서린 기억이 있다.

양산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한 고등학교를 진학한 박 씨가 친적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즈음이었다. 당시 저녁에 물금역에 내리면 버스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조심조심 다녔다. 공비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요즘 부모들이 자녀 등하굣길에 납치나 강도 때문에 걱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 길을 내가 딱 한 번 혼자 걸어온 적이 있다. 기차에서 내렸는데, 사람이 다 가고 없는 거라. 밤에 혼자 오는데 어찌나 진땀이 나던지. 영대교를 건너고 얼마 안 가 앞서 걷는 사람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살았다 싶더라. 집에 오니 부모님이 ‘아이고, 왜 왔노’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 이후론 절대 혼자 오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아픈 추억만을 남겨놓은 것은 아니다.

양산중학교 3학년이던 당시 여학생들로 합창단을 이뤄 위문 공연을 다닌 것. 원동부터 웅상까지 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양산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무용도 곧잘 하던 박 씨는 합창뿐 아니라 무용도 선보였다. 박 씨는 전교 여학생을 대상으로 했는지 일부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지만 꽤 많은 수의 학생들이 참가했다고 얘기했다.

“당시 음악 담당이 엄정행 교수 아버지인 엄영섭 선생님이셨지. 엄 선생님 지휘 아래 중학생으로서는 감히 배울 수 없는 수준 높은 노래를 많이 배웠었다. ‘고항의 봄’부터 ‘새야 새야 파랑새야’, ‘농부가’, ‘가고파’, ‘성불사의 밤’, ‘보리수’ 등. 노래 배우는 것도 즐겁고, 배운 걸로 군인에게 위로도 되고, 기쁨도 줬지”

박 씨는 당시 친구들을 요즘 만나면 엄 선생님과 합창으로 위문 공연 하던 얘기를 나누며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말했다. 전쟁의 아픔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시절이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를 배우고 위문 공연을 다니던 학교 생활은 마냥 즐거웠다.

“예전에는 많이 고달팠거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젊은이들도 예전 어른들이 살았던 것들을 잊지 않고 열심히 살아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지”

↑↑ 박인숙 어르신이 희망고개에 서서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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