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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양산의 뿌리를 찾아서] 유적(지명)으로 보는 향토사 ④ ..
기획/특집

[양산의 뿌리를 찾아서] 유적(지명)으로 보는 향토사 ④ 우불산성(于弗山城)과 삼호리 고분군(古墳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2/06/12 11:27 수정 2012.06.12 11:45
신령한 산 우불산에서는 국태민안 비는 제사 올려




↑↑ 주남동에 있는 우불산 전경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우불산은 삼호동 산 2-3번지 일원에 있다. 서창동에서 북쪽으로 약 1km 쯤에 있는 산인데 높이는 해발 209m 밖에 안 되는 야산이다.
삼한시대에 이곳의 지명이 우화(于火)였는데 우화의 화(火)자의 뜻이 불과 같으므로 불이라는 말을 한자로 표기하여 우불(于弗)이 되고 산 이름도 우불산(于弗山)이 된 것으로 보인다. 또 신라 경덕왕 때에는 우화현을 우풍현(于風縣)으로 고쳐 불렀고 이 우불산 아래에 우풍현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현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우불(于弗), 우화(于火), 우풍(于風)은 모두 같은 지명이다. 아무튼 우불산은 삼한시대 초기 때부터 지금까지 불리어져 오고 있는 매우 유서깊고 영험이 있는 신령한 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포곡식 석축산성 흔적 남아


↑↑ 우불산성의 석축성벽 흔적
산 꼭대기로 빙 둘러쳐진 포곡식(包曲式) 석축산성이 쌓아졌고 지금도 그 흔적이 길게 남아있다. 그 모양이 마치 조개껍질 모양으로 정상을 빙 둘러 처져있다. 그러나 이곳의 석축에 대한 기록이 없어 언제 쌓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삼한시대 초기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우불산에서 서북쪽에 인접해있는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일원이 삼한시대에는 우시산국(于尸山國)이라는 부족국가의 도읍지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우불산에 성을 쌓아 우시산국을 보호하는 수호성(守護城)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키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불산성은 우시산국과 역사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불산성의 면적은 4만3천315㎡이고, 둘레는 769.82m, 폭은 2~3m, 흔적이 남아있는 성의 높이는 3m이다. 성돌은 활석이 대부분이고, 성문은 남아있는 모습이 훼손되어 알 수 없고 남북 모서리에 망루와 치성(雉城)이 함께 축조되어 있었다는 흔적을 볼 수 있다. 우불산성은 2005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259호로 지정되었다.


산천제사 지내는 우불산신사


↑↑ 산천제사를 올리는 우불신사
우불산 신사는 우불산의 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양산시 용당동 1134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87호로 1991년에 지정되었다.

국가에서 행하는 산천제사(山川祭祀)는 신라 때부터 있었는데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하여 나라 안의 큰 산과 강, 바다 등을 동서남북 사방에 지정하였는데 대사는 3곳, 중사는 17곳, 소사는 24곳을 지정하여 산천제사를 지내왔다.

우불산은 소사(小祀) 24곳 중의 한 곳으로 지정되어 산천제사를 지내왔다. 우불산 신사의 제사는 신라 때부터 고려, 조선 한말까지 지방관인 울산수령이 나라에서 내리는 향과 축문을 받아 봄과 가을, 일년에 두 차례 지역의 방호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하여 향사를 지내왔으며 가뭄이 심할 때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 강점기를 맞아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의례는 중단되고 단사는 허물어져 빈터만 남았다.  이에 웅상, 웅촌 유림들은 영험이 있는 이 우불산의 제사를 방치할 수 없다 하여 성금을 모아 1919년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신사(神祠)를 복원하고 우불단보존회를 발족하여 해마다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건물은 여러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직 찾지 못한 우불단(于弗檀)


우불신사 사적기에 보면 태조 이성계가 일찍이 건국의 뜻을 품고 1391년 팔도명산을 돌다가 여기에 이르러 단(檀)을 모으고 기도한 곳이라고 했다. 풍운뇌우(風雲雷雨)의 산천제는 단을 쌓아놓고 천장의 막힘이 없이 개방된 상태에서 제를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이곳 소사를 행하는 곳에도 단(檀)이 있었을 것이다. 이곳을 보존하는 민간단체 이름도 원래는 우불단보존회가 아니든가. 아마 단 위에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이곳 지역민들은 우불산을 단갓(檀山)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아마 어딘가 단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단소(檀所)를 찾아 복원해야 하겠다. 만약 단소를 찾지 못하면 새롭게 단을 설치하여 단위에서 산천제행사를 재현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왜시등(倭屍嶝)의 유래


우불산 앞길에는 고관대작이라도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해야 한다. 어느 날 경상감사 양 씨가 그 말을 듣고도 교만하게 말을 타고 지나가는데, 혼연히 한 점 붉은 구름이 호랑이로 변해 양 씨를 물어 죽였다. 우불산신을 무시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양 씨의 묘는 웅촌면 검단리 감사골에 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조정에서도 이를 듣고 영험이 크다 하여 1644년(인조 22)에 신사 1간, 제사 3간을 세우고 논 5두락을 단(檀)의 운영재산으로 하여 울산부사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때 왜병이 우불산 남쪽에 포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바람이 일어 왜군의 진을 급습하여 왜병 수백명을 섬멸하니 후세사람들이 그 바람을 신풍(神風)이라하고 그 진지에 왜인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해서 왜시등이라 하였다고 한다.

일제 때에 강제로 인부를 동원하여 우불신사를 헐게 하였는데 누구도 두려워하여 선뜻 나서지 않았다고한다. 윤 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큰마음 먹고 집을 헐었는데 불과 수일이 지난 후에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후에도 왜의 헌병이 칼을 차고 말을 몰아 왜시등을 지나다가 죽었다는 말이 전한다.


삼호리 고분군(古墳群)


삼호리 고분군은 우불산 서남쪽 기슭인 주남동 산 91번지 외 7필지에 있다. 군의 면적은 8만3천559㎡이고 2005년도에 경상남도기념물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고분 일대의 표고는 해발 100~128m로 비교적 완만한 경사지를 형성하고 있다.

고분의 형태는 소형 횡혈식 석곽묘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곳저곳에 도굴에 의한 훼손상태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최근 묘지 조성을 위한 도로가 개설되면서 고분이 일부 파괴된 곳도 보인다. 대표적인 고분 크기는 직경이 5.4m 내외이고 높이는 2m 내외로 작은 무덤 형태를 하고 있다. 도굴된 고분의 안을 살펴보면 외곽에 석축을 쌓고 그 안쪽에 목곽과 부장품을 놓아둔 수혈식 석곽묘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수집된 유물은 모두 신라의 토기로 보이며 연대는 5, 6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3년도에 지표조사시에 발굴된 유물로는 옆구리에 구멍이 나 있는 유공경배가 있었고 목이 약간 긴 장경호 항아리와 단경호와 대호 및 옹관편이 있었는데 대개 6세기 이전 양식으로 추정하였다. 
 
시급한 보존대책


↑↑ 도굴된 고분 주변 모습
우불산성, 우불산신사, 삼호리 고분군은 웅상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꼽을 수 있다. 우불산성의 복원계획을 수립하여 사업인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안내간판이라도 보였으면 하는 마음과 하루빨리 산성과 우불단이 복원되어 지역의 안녕을 위한 영험있는 산으로 복원되었으면 좋겠다.


자료출처 : 향토연구/2010 (양산향토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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