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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빛과 소금] 한 편의 영화가 인생을 바꾸다..
오피니언

[빛과 소금] 한 편의 영화가 인생을 바꾸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2/07/10 11:25 수정 2012.07.10 11:25



 
↑↑ 강진상 목사
평산교회
 
1955년 가을 미국 오리건주 유게네에서 있었던 일이다.어느날 마을회관에서 종교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났다. 영화는 한국전쟁 고아들의 참상을 소개하며 도움의 손길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영화를 본 한 농부 부부의 가슴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고아들이 불쌍하기는 하나 가난한 농부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그런데 날이 갈수록 마음 아픈 장면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부부는 이 일을 기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농장의 일부를 팔아 직접 고아 8명을 양자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들이 바로 홀트 양자회의 주인공인 해리 홀트 부부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 연방법에는 2명 이상 입양할 수 없었다. 이에 부부는 의회 앞에서 캠페인을 벌였고, 의회는 두 달 만에 ‘홀트법안’이라는 개정안을 통과했다. 결국 1955년 10월 8명의 한국전쟁 고아를 입양했다.

이들의 입양은 당시 미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이었다. 미국 사회사업기관들은 국제 입양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국제 입양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부는 가족의 사랑은 인종과 국가의 벽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사실이 마을 신문에 기사로 나가자 이들을 돕겠다는 편지가 왔고 어떤 가정에서는 고아를 양자로 삼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농부는 이 일에 매달리게 됐다. 부부는 적극적인 입양사업을 위해 1960년 한국에 홀트아동복지회 전신인 ‘홀트 양자회’를 설립하고 국제입양사업을 활성화했다. 그러다 1964년 남편 헤리 홀트가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버서 홀트 여사는 혼자 남겨졌지만 사업을 접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입양아들의 할머니로 남아 위탁가정을 찾기도 하고, 장애인복지시설과 특수학교를 운영했으며, 장학사업과 상담, 미혼모 발생 예방을 위한 교육 사업을 했다. 둘째딸인 말리 홀트도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간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부모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다.

홀트 여사가 2000년 7월 31일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입양된 전세계 고아들은 무려 20여만명에 이른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지낸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대로 경기도 일산에 있는 헤리 홀트 묘 옆에 묻혀 있다. 그녀는 세계의 여성상(1966), 국민훈장 모란장(1974), 국민훈장 무궁화장(1995), 특별봉사상(1997)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동방의 자손들’, ‘원방에서 내 자녀들을 오게 하라’ 등이 있다.
한 편의 비극적인 한국전쟁 영화가 가난했던 농부의 부부 마음과 생각, 그의 미래를 바꾸어 놓았다. 그가 남긴 명언이 있다. “어린이는 사랑 받을 때 가장 아름답게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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