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에베레스트가 있는 쿰부 골짜기를 찾을 때마다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아주 특별한 곳이 한 군데 있다. 그 곳은 다름아닌 깊고 넓은 골짜기 탱보체 곰파 오른쪽 위로 우아하고도 화려하게 한눈에 들어오는 아마다블람이다.
‘어머니의 목걸이’라 불리는 아마다블람(6천856m). 누구든 아마다블람과 마주하면 그냥은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아마다블람은 만인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매력적인 곳이다.
그 멋들어진 자태에 매료되어 나는 언젠가는 정상에 올라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희열과 성취감, 그리고 후회 없는 등반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2004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부산방송 창사 10주년 기념으로 조직된 ‘2004경남아마다블람·옴비가찬원정대’가 바로 그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아마다블람 원정길
원정대는 모두 17명으로 대부분 혈기 넘치는 20대 중반으로 대학산악부원이거나 출신자들이었다. 패기로 가득찬 젊은 산악인들을 보자 순간 난 어떤 의무감을 느끼며 돈키호테 같은 발상으로 후배들을 위한 원정대를 꾸리기로 마음먹었다. 1년간의 고된 훈련과 경비 조달 등 힘들겠지만 모험으로 가득한 열정을 가지고 추진해 보기로 했다.
경남연맹의 부회장으로 원정대 훈련에 있어서는 히딩크로 통하는 이병갑 대장에게 훈련대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본격적인 원정훈련에 돌입했다. 설악과 지리산, 그리고 영남알프스 산자락에서 1년 가까이 고된 훈련과정을 거친 뒤 원정대는 마중나온 환송인사들을 뒤로 한 채 동계등반과 세계초등이라는 목표를 걸고 장도에 올랐다. 2004년 11월 28일의 일이었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트리부반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겨울 날씨 치고는 매우 포근한 편이였다. 공항 북쪽의 가네쉬 히말이 우리들을 반기는 듯 환하게 설산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공항을 빠져나가니 현지 에이전트인 아시안트레킹 툭텐과 네팔등산협회(NMA) 회장인 앙체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셀파 사다인 펨바 도르지도 마중나와 있었다. 원정대는 매연 투성이의 카트만두 중심부를 통과하여 비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 서울의 동대문 시장같이 북적거리는 타멜거리의 가든홈이라는 곳에 여장을 풀었다.
![]() |
ⓒ |
지금 이 시대를 끌고가는 이념은 과학정신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등반정신도 때론 과학적인 사고가 필요할 때가 있다 특히 히말라야라는 곳이 그런 곳이다. 히말라야 원정등반은 모험가답게 대담해야 하는가 하면 과학자처럼 치밀해야 할 때도 있다.
아마다블람과 옴비가찬 등반의 완성을 위해 우린 카트만두에 체제하면서 행정처리를 위해 3일을 보냈다. 원정대원 숫자가 많다보니까 아마다블람 등정허가도 두 팀으로 받아야 했다. 네팔관광성의 등산규정에 따르면 한 원정대의 최대인원수는 12명을 넘지 못한다.
카트만두에 도착한 사흘 뒤 드디어 우리는 상행카라반을 나섰다. 17인승 경비행기는 히말라야 난기류에 시달리며 40분을 날아 루클라라는 곳에 우리들을 내려놓았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도보 이동이 시작된다.
루클라공항 인근 레스토랑에서 밀크티와 블랙티 또는 레몬티를 한 잔씩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짐을 챙겨 2시간을 걸어 올라갔다. 출렁이는 사다리 서스팬션브릿지를 건너자마자 히말라얀 체인 리조트가 나타났는데 팍딩이라는 곳이다.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리는 쿰부 빙하를 타고 흘러 남체바자르 밑에서 다시 두드코시와 보데코시강이 합류하면서 수량이 많아진 빙하수는 요란한 굉음을 내며 숙소 옆을 끼고 굽이치며 흘러 내려갔다. 산중 식사로는 제법 그럴 듯한 저녁을 먹고 팍딩에서 첫날을 보냈다.
중간기착지 남체바자르
다음날은 남체바자르로 가야한다. 셀파의 고향이라는 남체바자르는 고도가 3천m가 넘는다.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의 네팔 이름)국립공원 체크포인트를 통과하기 전 몬죠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도중에 적당한 장소가 없어 할 수 없다. 팍딩을 출발한 지 6시간 만에 남체바자르에 도착했다.
마침 일주일에 한 번씩 선다는 토요일 장을 하루 앞두고 있어 부족한 물자를 더 구입할 수 있었다. 쿰부골짜기에 있는 경제의 중심 남체바자르는 장이 서는 날이면 인근 타메나 굼중 그리고 팡보체에서 온 사람들과 상인들로 붐비는 산골 장터 마을이다. 옛날 우리나라 5일장을 보는 것 같다.
히말라얀 롯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고도가 3천m를 넘어서니 몇몇 대원들이 약간의 고소증세를 보였다. 고소등반수칙을 강조했다. 천천히 먹고 천천히 걷고 물을 많이 마시라는 조언이다. 롯지에 머물면서 인말세트를 가동시켜 우리들의 카라반행렬을 고국에 알렸다. 상행 카라반 3일째가 되는 날이다. 오늘은 상보체를 거쳐 고도 3천800m를 넘어서는 굼중까지 운행하기로 하고 고도를 서서히 높혀갔다.
![]() |
ⓒ |
에베레스트 초등자 힐러리가 세운 굼중스쿨을 돌아가니 아마다블람이 지척에 보이는 굼중호텔이 나타났다. 여장을 풀고 목탄난로 앞에 모였다. 숙소를 배정한 뒤 대원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이틀 뒤 도착할 베이스캠프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 날 아침, 호텔 창으로 보석처럼 빛나는 아마다블람이 화려한 자태를 드러냈다. 뿌듯한 희열이 솟는다. 건너편에는 만년설 아래 고찰 탱보체 곰파가 보였다. 낯익은 곳이라 잠시 고개를 숙여 대원들의 무사등반을 기원했다.
잠시후 팡보체를 향해서 굼중을 출발했다. 짐수송으로 북적이는 야크 떼와 현지고용인, 그리고 대원들이 함께 어우러져 쿰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말이 원정이지 무슨 군사 작전과도 같아 보이는 히말라야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풍기텡가로 내려섰다가 다시금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탱보체로 올라가는데 일부 대원들의 힘들어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팡보체에 도착하니 피로가 가중되고 거동이 어려운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연 베이스캠프에 전 대원이 입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가기 시작했다. 대원들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말 아침 역시 우려했던 대원 둘이 고소증세가 심각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약을 먹이고 사혈을 하는 등 애를 써봐도 진행이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는 수 없이 하루 더 쉬도록 지시하고 나머지 일행을 이끌고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날씨는 다행히 연일 포근한 상태를 이어갔다. 아마다블람 여신이 우리를 도와주는 걸까. 두드코쉬강을 건너뛰고 먼지 투성이 가파른 비탈길을 힘들게 올라서니 넓은 야크카르카가 나타난다. 거미줄처럼 얽혀서 어느 길이 올바른 길인지를 가늠하기가 어려워 그 중에 많이 다닌 흔적이 있는 큰 길로 루트 파인딩을 해가며 나아갔다.
학교 운동장같이 아늑한 베이스캠프
팡보체를 출발한 지 4시간이 좀 넘어서야 우리는 해발 4천5백미터의 베이스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학교 운동장 같은 목초지로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식수 구하기도 어렵지 않았고 뒤편 언덕에는 화장실도 깔끔하게 지어져있어 등반의 전초기지로 사용하는 데 손색이 없었다. 먼저 도착한 요리사 나왕 파상이 따뜻한 밀크티를 날라주며 반갑게 맞이한다.
다음날 팡보체곰파에서 오신 큰스님을 모시고 무사등정과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라마제를 지냈다. 베이스캠프에서 3일을 보낸 뒤 캠프1로 전대원들이 고소운행에 나섰다. 고소운행이 처음이라 힘들어하는 대원들이 많았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나는 대원들에게 이틀을 쉬게 한 뒤 캠프1로 올라갈 능력 있는 대원들을 선발한 후 12월11일 베이스캠프를 출발시켰다. 나는 이들이 제대로 등반을 해주기를 바랬으며 산에서 만난 아주 소중한 인연이 되기를 기대했다.
나머지 대원들도 별 탈 없이 고소적응을 잘했지만 2조로 편성하여 하루 뒤인 12월12일 캠프1까지 등반하도록 했고 그곳에서 자고 캠프2로 릿지등반을 감행한 후 터치다운하도록 했다. 등반을 떠날 때마다 라마제단 앞에서 아마다블람 여신에게 간절히 소망한 뒤 제단을 한 바퀴 돌아 올라가는 모습들이 믿음직스러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