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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양산의 뿌리를 찾아서
낙동강 하구 낙조(落照)와 어울려 절경 연출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2/08/14 13:33 수정 2012.08.14 01:34
유적(지명)으로 보는 향토사 ⑤ 오봉산(五峰山)과 임경대(臨鏡臺)






↑↑ 물금신도시의 배경으로 병풍처럼 펼쳐있는 오봉산, 가운데 부분에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자리하고 있다
오봉산(五峰山)은 물금읍과 원동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제일 높은 봉우리가 해발 530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다. 그러나 낙동강을 끼고 있어 산과 강이 어울려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워 옛날부터 많은 문인들이 이를 배경으로 시를 남겼다.

원동면 서룡리에 사셨던 지암(旨庵) 김우권(金禹權) 선생의 문집에 보면 원동 화제리의 아름다운 풍경 8경(八景)을 노래했는데 그중 한 구절이 “오봉귀운(午峰歸雲)”이었다. 즉 남쪽봉우리에 구름이 감아 도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내황산에서 오봉, 오봉산으로 오(午)는 남쪽방향을 뜻한다.

남쪽의 산봉우리를 오봉(午峰)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의 오봉산(五峰山)이라는 이름은 1920년대에 개교한 물금초등학교 교가에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 이후에 불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물금 쪽에서 산 정상을 바라보면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 오봉산(五峰山)이요, 원동 쪽에서 바라보면 남쪽에 보이는 오봉산(午峰山)인 것이다. 발음은 같으나 내용은 다르다는 뜻이다.

오봉산의 옛 지명은 황산(黃山)이었다. 황산 끝의 벼랑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은 황산강으로 불리었고, 강 옆 절벽 위로는 영남대로가 있어 중요한 국도의 역할을 하였고 그 중 황산구간의 길을 황산도라고 했으며 물금읍 서부리에 황산역이 있었다.

진성여왕의 혼이 깃든 곳인지도

삼국사기에 보면 ‘진성여왕 11년(907년) 겨울 12월에 왕이 북궁에서 죽었다. 시호는 진성(眞聖)이라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삼국유사 왕력편에 보면 ‘제 51대 진성여왕 12월에 돌아가셨다.

모량에서 화장하여 서쪽산인 황산에 뼈를 뿌리고 장사하였다’라고 되어있다. 또 1669년에 간행된 『동경잡기』 능묘조에 보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황산은 지금의 양산시 물금이라고 비정(比定)하고 있고 상북면 모래불 마을의 옛 지명이 모량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곳이 진성여왕의 혼이 깃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 신라 때 축조돼 마고성으로 불리기도 했던 오봉산 정상의 산성 흔적
고장성 쌓아 신라를 지키다


 오봉산 안쪽인 교동과 화제를 경계하는 산 정상 부근 해발 410m 부근에 테뫼식 석축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 주민들은 이 성을 마고성이라 부른다. 마고할미가 쌓았다고 보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양산군 고적조에 ‘고장성은 황산강의 동북쪽 언덕위에 있는데 돌과 흙을 혼합하여 쌓았다(古長城在黃山江東北岸石土雜築)’라고 되어있다. 황산강은 지금의 낙동강을 말하므로 교동 뒷산에 있는 성이 고장성(古長城)으로 짐작이 된다.

또『삼국사기』에 보면 ‘문무왕 13년 9월 삽양주에 골쟁현성을 쌓았다(九月築城良州骨爭峴)’라고 되어 있어 그 골쟁현성(骨爭峴城)이 이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마고산성, 고장성, 골쟁현성이 오봉산(황산)에 있는 같은 산성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이 곳 양산이 신라의 적을 방어하는 교두보 역할을 한 곳이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임경대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

신라 말 최치원선생은 전국을 유상하다가 경치가 좋은 곳에 머물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이곳 오봉산 끝자락인 낙동강 절벽 위에 고운 최치원선생이 유상하던 곳이 있다. 이곳을 고운대 또는 임경대라고 한다. 고운은 최치원선생의 호이고 임경대는 시(詩)의 제목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 보면 ‘임경대(臨鏡臺) 혹은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하는데 황산강 서쪽 절벽 위에 있으며 최치원(崔致遠)이 놀고 즐기던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경부선 철도의 개설 등 환경적인 변화로 임경대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문헌의 고증을 거쳐 2003년도에 지금의 이 곳으로 비정하였다. 이 곳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면 정말 절경이다.

↑↑ 오봉산 끝자락 임경대 터에서 바라본 낙동강 하류
철광석이 많이 나오는 산


 물금 오봉산에서 철광석이 나온다는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다.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이미 철이 생산된다고 기록되어 이때부터 철광산이 시작되었다고 보아진다. 그러니까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후 한국의 경제 개발계획이 시작되던 1962년부터 이지역의 철 생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995년까지 30년 동안 철광석을 생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이 지역에 많은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전성기에는 연간 20만톤의 철을 생산하였고 800여명이 종사하여 철광산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했고 외지사람들의 잦은 왕래로 숱한 애환을 뿌리기도 하였다. 지금은 광구 입구에 레미콘 공장이 가동되고 있어 번창했던 한때를 생각하게 할 따름이다.

황산역과 황산잔도 

오봉산 끝자락인 낙동강변은 절벽으로 되어있다. 옛날 이곳 영남대로는 절벽에 길을 내고 다녔으므로 매우 위험한 길이었다. 어려운 곳은 바위에 구멍을 내고 나무를 박아 평탄한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을 잔도(棧道)라고 했다.

여기에 그 유명한 황산잔도가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경부선 기찻길을 만들면서 모두 훼손되고 그 잔도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최근 철길 옆 낙동강에 자전거길을 만들어 그 벼랑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옛 자취를 더듬을 뿐이다.

 
↑↑ 정동찬
양산향토사연구소장
 
황산잔도를 지나 물금읍 서부리로 꺾어 들어오면 지금은 없어진 황산역이 있었다. 말을 타고 여행하던 관리나 백성들이 들러가는 곳이다. 여기서 묵으면서 말발굽도 갈았다. 황산역은 산하에 16개의 역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역 책임자의 관직은 찰방이었다.

종사원은 모두 천명에 이르렀고 물금, 가촌 앞 들판에서 생산되는 곡식은 모두 이들을 먹여 살리는데 쓰였다. 옛 황산역 터에 그때를 알 수 있게 하는 기념관이라도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료출처 : 양산사료총람 2006/양산향토사연구회
물금읍지 1998/읍지편찬위위원회 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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