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과 함께 뒤바뀐 운명ⓒ
일제에서 해방된 만세소리가 전국을 뒤덮은 1945년 8월 15일. 여섯 살 어린아이 망절일랑에게는 운명이 바뀌게 된 날이다.
김해경찰서 간부로 근무하던 일본인 아버지는 다음날부터 가택연금상태에 들어갔다가 불시에 본국으로 강제소환돼 갔던 것이다.
아들을 찾을 시간도 없이 부모와 생이별하고 한국땅에 홀로 남게 된 망절일랑은 김해 진영에서 의사로 있던 양 씨 집에 양아들로 들어갔다.
‘일랑’(일본명 이치로)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쓰고 양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아 ‘양일랑’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랐다. 하지만 진해충무중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던 중 양부모가 세상을 떠났다. 학교를 그만둔 망절일랑은 공사장에서 막노동일을 하면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NHK방송 통해 친아버지 찾았지만
그러다 18세가 되던 1958년, 농협에 입사하게 된다. 당시 이동조합이었던 농협이 단위농협으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지도요원 인력을 필요로 했고, 망절일랑은 지도요원으로 농협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생활은 점차적으로 안정을 찾아나갔다. 얼마 후 축협으로 근무지를 옮겼고, 당시 동래군 축협에서 일하던 아내와 결혼했다. 아이도 생겼다. 그러면서 뿌리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자식까지 자신의 양부모 호적에 올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망절일랑은 뿌리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일본 NHK 방송국에 헤어진 친아버지를 찾는다는 편지를 보냈고,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를 찾게 됐다.
하지만 21년 만에 찾은 친아버지는 후두암 수술 후유증으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라 만나러 갈 수도 없어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당시는 병역을 필하기 전에는 해외여행을 할 수 없었기에 자진 입대하여 최전방에서 병역 의무를 수행했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일념에서 고생을 참아냈다.
일본인으로, 다시 한국인으로 ↑↑ 망절일랑 선생은 올해 6월 톱밥 배지를 활용, 홍삼 표고버섯을 개발해 화제를 모았다. ⓒ
그러던 중 망절일랑은 한국정부에는 호적 정정을 위한 ‘친자부존재심판’을, 일본정부에는 ‘친생자 관계 확인소송’을 각각 청구했다.
이 소송은 양국 정부에게 모두 받아들여져 친아버지 호적에 편입됨과 동시에 일본 국적을 얻게 됐다. 병역의무가 자동적으로 없어짐에 따라 23개월 복무를 끝으로 제대한 그는 일본 가고시마로 아버지를 찾아 현해탄을 건넜다.
하지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더구나 7대 독자였던 아버지는 망절일랑이 의지할 만한 친척이나 지인을 남겨두지 않았다. 처가가 있고 친구들이 있는 한국으로 다시 건너온 망절일랑은 1970년 말 다시 한국인으로 귀화신청을 했고, ‘망절’이라는 성으로 호적을 만들었다. 이제 한국인 망절일랑이 탄생한 것이다.
고소득 버섯 재배에 눈 돌리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생활은 쉽지 않았다. 호적 정정 소송으로 빚도 많이 진 상태였다. 결국 집을 팔아서 빚을 정리하고 짐보따리 하나만 둘러멘 채 양산으로 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는 자신이 있었다. 남의 땅을 빌어 소작을 하고 야산을 개간해 밭을 일구었다. 하지만 빈손으로 시작한 농사는 미래가 없었다. 좁은 땅에서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리하던 망절일랑은 일본 시장에서 보았던 버섯을 떠올렸다.
당시 한국에는 버섯재배와 유통이 정착되지 않았다. 버섯에 대한 인식도 미미했다. 한번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새송이버섯 개발로 ‘버섯박사’ 우뚝↑↑ 망절일랑 선생(뒷줄 오른쪽에서 일곱번째)은 한·일 교류의 물꼬는 트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사진은 2010년 일본 가고시마현 기리시마시 마에다 시장 일행이 양산을 방문했을 당시 모습. ⓒ
버섯 농사를 뛰어든 지 10여년이 지난 망절일랑에게 특별한 계기가 주어졌다. 훗날 ‘버섯박사’라는 별칭을 얻게 되는 사건이다. 지금은 흔한 새송이버섯의 국내 최초 상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영국에서 처음 개발된 그 버섯(당시에는 새송이버섯이라는 이름이 없었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몇 조각이 한국 진주농업기술원에 넘어왔다. 그곳에서 조직배양을 하고 버린 버섯 조각을 실습을 나간 작은 아들이 주워온 것이다.
버섯 조각을 받은 망절일랑은 조직배양을 시작했고, 진주농업기술원보다 먼저 시장에 제품을 출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새송이버섯’이라는 이름을 단 망절일랑의 버섯은 양산지역 특산물로서 전국 대형할인점은 물론 일본으로도 수출됐다.
하지만 버섯박사라는 명성은 단지 그가 새송이 버섯을 개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틈틈이 농업기술센터 관계자와 논의하고, 경기도 수원에 있는 농업진흥청까지 다녔고, 버섯재배에 대한 강의도 나갔다. 버섯박사를 증명해줄 학위는 없지만 버섯박사로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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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광합성 세균에 의한 수경농법으로 상추를 재배하는 친환경 농법을 선보이는가 하면, 톱밥 배지를 이용해 생육 기간을 단축한 홍삼 표고버섯도 개발하면서 선도적인 농업인의 길을 걸어왔다.
한ㆍ일 민간교류 협력에 일조
일본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아온 만큼 한ㆍ일 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망절일랑은 양산시 수출농가협의회장을 맡으며 양산과 일본 가고시마(鹿兒島)현 기리시마(霧島)시와의 상호방문을 통해 농업기술과 정보를 나누고 협력관계를 다지는 데 앞장섰다.
일본인으로 태어났지만 역사적 소용돌이를 지나 한국인으로 다시 살아야했던 망절일랑 선생. 그는 친아버지 묘소도 양산으로 옮겼을 만큼 스스로 한국인으로 자부하며 당당히 살아왔다. 일본이라는 국가와는 단지 과거에 일본인이었다는 것뿐이다. 망절이라는 성은 일본인이라는 나라와 상관없이 뿌리, 조상을 잊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버섯농사에 도전하고, 차별화된 버섯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개발하다 다시 흙으로 돌아간 버섯박사 망절일랑. 그가 한국인으로서, 농업인으로서 걸어온 길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