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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목마와 숙녀
사회

목마와 숙녀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2/09/04 09:45 수정 2012.09.04 09:49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박인환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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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도 무늬로 남아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시, 제가 시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작품입니다.

고등학생 때 처음 이 시를 접하고 왠지 모르게 가슴 먹먹해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네요. 아마도 이 시를 관통하는 애상(哀傷)적 정서가 어린 감성을 자극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퇴색하며 떠나가는 데 대한 절망감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는 6.25 직후의 상실감과 허무감을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
 
전쟁 직후, 인생 항로의 좌표를 잃고 살아가던 시인은 “상심한 별”과 “불이 보이지 않는 등대”와 같은 절망 속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며” 고통을 극복하려 했지만, 결국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것처럼 비극적 상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요.

“정원 옆에서 자라던 소녀”에서 “목마를 탄 숙녀”로, 다시 “늙은 여류 작가”로 변모하면서 허무와 불안 의식을 견디지 못하고 ‘템즈강’에 투신자살한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 생애처럼. 짧은 생애를 통해 문학과 술을 벗하며 현대 문명의 위기와 불안 의식을 노래한 그는 ‘우수(憂愁)의 시인’으로 불리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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