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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양산초의 어제
100년 전통 양산교육의 산 역사

엄아현 기자 coffeehof@ysnews.co.kr 입력 2012/09/11 11:41 수정 2012.09.11 11:41




세월의 변화에 따라 위상의 부침은 있었지만 양산초를 ‘양산 초등교육의 산 역사’이자 ‘양산의 인재 젖줄’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양산초는 개교 100주년을 맞아 ‘제2의 도약’을 선언하고 이제 다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1912년 90명 학생으로 양산공립보통학교 개교

양산초는 구한말 일제통감부의 통제를 받던 1906년 사립양성학교가 모태가 됐다.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1912년 ‘양산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90명의 학생으로 시작해 한 세기가 지난 현재 99회 졸업생까지 모두 1만5천여명의 학생이 양산초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1945년 광복 이전 양산 유일의 초등교육기관이었던 양산초는 부설속수학교, 어곡간이학교, 금산간이학교, 남부동간이학교 등을 부설학교로 탄생시켰다. 일제 하의 암울한 시대와 한국전쟁의 아픔을 거치면서 부설학교들은 자연폐교 됐지만, 양산초는 명맥을 유지하며 건재함을 자랑했다.

이후 1949년 삼성초등학교 분리, 1985년 양주초등학교 분리, 1994년 신기초등학교 분리 등 양산을 대표하는 학교들의 모교로서 양산교육의 변천사와 그 맥을 같이했다.

1970년에는 60여년간 지켜왔던 학교 터(현 중앙동지구대 일원)를 뒤로하고 현재의 위치로 학교를 신축해 이전한 후, 1974년 경남교육위원회 선정 산수과 우수학교 표창, 1978년 특별활동 시범학교 교육감 표창, 1988년 국민정신교육 도 최우수 학교표창 등 양산의 명문초등학교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독립운동가, 장관 등 배출 양산의 인재 젖줄

‘양산의 인재 젖줄’이라는 이름처럼 졸업생 중에는 훌륭한 인물도 많다. 일제강점기 식민시대 전병건(2회), 엄주태(3회), 강재호(6회)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양산3ㆍ1의거, 청년운동, 농민운동을 주도했다.

광복 후에도 서장주(22회) 국회의원, 최해군(26회) 소설가, 김동휘(32회) 상공부장관, 박봉식(32회) 전 서울대 총장, 이돈희(37회) 전 교육부 장관 등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을 비롯해, 양산지역 다수의 정치인과 경제인들을 탄생시켰다.

또한 82회 졸업생이 사법고시에, 86회 졸업생이 행정고시에 최종합격했을 정도로 양산초는 끊임없이 훌륭한 인재를 배출해 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故 김인자 교사 역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24년 전 양산천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 물에 빠진 학생 둘을 구하기 위해 임신한 몸으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김 교사는 양산교육에 길이 남을 훌륭한 교사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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